brunch

01.분홍 파도의 자장가

그림 : Dottie Kim 글 : Mama Lee

by kimleekim

바닷가 하늘이 뜨거운 빨강에서 오렌지로 변하고, 낮동안 가득 채운 물빛이 스르륵 쏟아지는 순간,

물결이 다급하게 일렁이며, 분홍빛 바다가 일어나서 다가온다.

하루 종일 참았던 말들이 비누방울처럼 쏟아지고, 이야기 방울 사이로 길고 가는 검은 손톱이 반짝인다.

엄마의 필터로 보는 동화는 마냥 아름답고 평화롭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등골이 오싹한 이야기 들이 숨어있다.

장난감에 생명을 불어 넣어 줄 만큼 선한 제페토 할아버지와 피노키오를 꿀꺽 삼키는 고래,

숲에 버려진 어린 여자 아이 백설 공주랑 같이 사는 일곱명의 성인 남자,

펄펄 끓는 마법의 약을 만드는 마녀에게 잡힌 헨젤과 그레텔,

최후의 보호막인 엄마와 언니들에게 구박받는 콩쥐와 신데렐라등

동화책을 읽어 주던 엄마는 원래 동화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깜짝 놀라고, 미키 마우스나, 라따뚜이를 보면 아이가 병균을 옮기는 더러운 쥐를 귀엽게 여기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를 등에 업고 천천히 걸으며,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분홍 파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을 덮고 있는 바다라는 커다란 집이 있어.

바디에는 크고, 작고, 온갖 모양과 색깔을 가진 파도가 있는데, 수다장이 분홍 파도 얘기를 해줄게.

분홍 파도는 안부를 챙기는 임무를 맡고 있어.

하루 종일 어찌나 바쁜지, 여기저기를 다니는데, 매일 밤 해가 지면 우리 아기를 찾아온단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지, 입이 풍선처럼 부풀어서는 하루 동안의 얘기를 들려준 단다. 우리도 들어 볼까?


있잖아. 오늘은 하루 종일 덥고 끈적거렸어.

일정은 얼마나 많은 지, 1분도 멈춰서 잔잔할 수 없었다니까.

이런 날은 이상하게 아무리 서둘러도 자꾸 늦어지는 거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몽돌 해변에 가야 했어.

아기 주먹만 한 조약돌이 1 키로 미터쯤 쭉 깔려 있는데, 지난주에 꼬마 아이가 종이배를 띄우러 왔다가 발바닥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다고 투덜 대는 것을 들었거든.

원래 맨들 맨들 부드러운 아기 조약돌이 가득했는데, 며칠 바빠서 돌보지 못했더니 뾰족 뾰족 자란 모양이다.

아기 조약돌 돌 본 적 있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몸을 크게 만들어서, 조약돌을 가득 안고 왼쪽 오른쪽으로 살살 흔들어 가면서 물 마사지를 시켜줘야 해.

물결이 아기 조약돌 하나하나를 감싸서 강약 중 강약 박자를 타면서 마사지를 하는 거야.

그러면 거칠고 뾰족한 게 하나도 없이 맨들 맨들 다듬어지거든.

기분이 좋은 아기 조약돌들이 그르릉 그르릉 옹알이를 하는데, 이때 나는 가사를 바꿔가면서 자장가를 불러줘.

“둥둥 아기 오리 엄마 품에 둥둥, 뽀로록 아기 조약돌 엄마 품에 뽀로록,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하늘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물결 따라 코 자라.”

생각 나는 데로 매일 지어 부르는 자장가를 아기 조약돌이 가장 좋아해서, 가사를 만드는 것도 큰 숙제 지 뭐야.


아침에는 플랑크톤을 찾아 이동하는 고래 가족을 만났어.

용감한 아빠 고래랑 싹싹한 엄마 고래에게는 바다가 놀이터처럼 즐겁지만, 아직 꼬리 힘이 약한 아기 고래에게는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

나는 아빠 고래와 엄마 고래가 모르게 아기 고래 뒤에서 각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면서, 강하고 밀도 높은 파도를 만들어서 아기 고래 꼬리에만 힘차게 밀어 넣어 준 단다.

그러면 아기 고래가 힘들게 꼬리와 몸통을 흔들지 않아도 파도를 거슬러서 앞으로 쭈욱 밀려가지.

얼마나 섬세하고 심오한 작업인지, 마치 의사 선생님이 수술하는 것과 같아.

그리고 탐정처럼 은밀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엄마 아빠 고래는 내가 다녀 간 것을 절대 몰라.

한 줄 파도로 꼬리 밀어주기는 나랑 아기 고래의 비밀이야.


고래 가족이 즐거운 식사를 즐기는 동안, 빠르게 방향을 틀어서 대형 컨테이너를 싣고 대양을 건너는 선장님을 만나러 갔어.

한 달 넘게 긴 항해를 하는 거라, 바다만 바라보고 지내기에는 너무 지루한 시간이잖아.

선장님은 항해 일지를 쓰고 계셨는데, 내가 몸을 크게 부풀려서 날렵하게 갑판에 올라가니, 손을 흔들면서 인사해 주셨어.

선장님의 동그란 방 창문에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리는 두툼한 손만 보였어.

마치 얼굴은 없고 거대한 손 하나만 있는 것처럼 보여서 깔깔깔 웃었더니, 내가 거품처럼 뽀르르 부서져 내렸어.

그 모습을 본 선장님은 손 흔드는 것을 멈추고 푸하하하 웃으시더라.

선장님이랑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바탕 신나게 웃고 나서 난 또 길을 떠났어.

서로 이해하는 진짜 친구랑은 때로는 말로 하지 않아도 단박에 이해되는 것이 있어.

나는 그런 교감의 순간이 참 짜릿해.


오후의 바다는 점점 뜨거워지고, 분주해져.

바다의 온도, 파도의 높이와 주기가 모두 다른데, 마치 거대한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몇 걸음 뒤에서 생각하고 움직여야 해.

아무리 잘 계획해도 실제와 다른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데, 오늘도 그랬어.


일 년에 한 번 가족 여행을 오는 가족이 있어.

밤이 되기 전까지 수영을 하거나, 까치발을 들고 있다가 다가오는 파도를 훌쩍 뛰어넘는 놀이를 하는 가족이야.

나는 담요처럼 부드럽고, 미지근한 포말을 담아서, 평소보다 20cm 정도 높은 파도를 만들어 보내.

리듬에 맞춰 힘껏 뛰면 물을 마시지 않고, 파도를 넘어 포말에 휩싸이게 돼.

마치 오늘 하루 수고했다 토닥여 주는 것처럼.

그런데, 물의 온도가 좀 차갑고, 파도 높이기 10cm 더 높아지는 바람에 꼬마 아이가 퐁당 물에 빠졌지 뭐야.

나는 깜짝 놀라서, 재빨리 파도 높이를 낮추고, 근처 바다를 빠르게 휘저어서 온도를 높여주었어.

귀여운 꼬마 아이 가족은 짭짤한 바다의 맛을 보고도, 용감하게 다시 파도 넘기 놀이를 했어.

휴우. 참 다행이야.


있잖아.

나의 분주한 하루는 마치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나는 너의 하루에 세상의 모든 하루의 이야기를 꽉 붙이고 눌러서 하나로 만들고 싶어.

그러면 너의 하루가 엄청나게 충실하고, 다양하고, 재미나고, 심오해지지 않을까?

어때?


분홍 바다의 수다가 끝날쯤에는 아이는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