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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Give & Take

안드레아 만테냐 & 조반니 벨리니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유래한 벨리니 칵테일(Bellini cocktail) 종류가 있습니다. 복숭아 퓌레나 꽃꿀을 프로세코 스파클링 와인에 섞어 만듭니다. 단맛이 강하지 않아 식사와 함께 마시기에 적합한 칵테일이지요




벨리니 칵테일의 원래 이름은 '벨리니'였습니다. 이 이름은 15세기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에서 유래했고요. 1948년  베네치아의 해리스 바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바 주인 주세페 치프리아니가 복숭아 주스와 프레세코 와인을 섞어 만든 이 칵테일에 '벨리니'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벨리니 칵테일이 유래했다고 해요. 르네상스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작품 색상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이 지어졌고요. 이런 유래 덕분에 벨리니는 베네치아의 전통과 예술을 상징하는 칵테일이 되었습니다.




 맛과 향이 상큼하고 부드러워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과일향과 청량감이 뛰어나고요. 또 다양한 상황에서 즐길 수 있어 활용도가 높습니다. 디저트 와인이나 브런치 등 다양한 자리에서 마실 수 있어 좋고요. 해리스 바와 치프리아니 가문의 명성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특별한 각테일입니다. 베네치아를 방문할 계획이 있으신 작가님들 계시면 한 번 맛보시길 권합니다. 색깔과 맛에 반하실 겁니다. 






1.조르조네(Giorgio Barbarelii 1478-1510),<폭풍 속으로The Tempest, 1508>2.티치아노( 1490-1576)<성모승천 1518>


 



padova & Venice/ Micoope




<그림1>. 흑사병으로 일찍 사망한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의 작품 < 폭풍 속으로 The Tempest, 1508>입니다. 음산하게 흔들리는 나무들 사이로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밀어닥칠 것 같은 구름의 묘사가 탁월한 작품입니다. 목동의 모습을 한 남자와 젖을 물린 채 희망이 없어 보이는 묘한 여인의 모습도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고요.  <그림 2>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90-1576)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 < 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1518>입니다. 천사들에 휩싸여 들어 올려지는 성모님의 황금빛 하늘 표현이 압권입니다. 이 그림을 계기로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의 로컬 화가가 아닌 글로벌 한 전 유럽의 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베네치아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로마나 피렌체 보다 르네상스 기운이 좀 늦게 도착한 곳입니다. 15-16세기, 상인들의 나라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상무역의 발달로 전 유럽의 희귀한 물건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진하게 거른 에스프레소 커피맛처럼 풍성한 경제를 바탕으로 동, 서양이 섞인 독특한 문화가 형성됩니다. 지금의 약사들이 약을 제조하듯, 물감을 비율에 맞게 조합해 파는 전문업자가 있었을 정도니까요.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들어오는 비싼 청금석을 풍부하게 쓸 정도로 타 지역 화가들에 비해 색에 대한 감각들이 뛰어났습니다. 북부 이탈리아로 당시 플랑드르(벨기에, 네덜란드) 지역의 화가들로부터 적잖은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림 1>과 <그림 2>의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그들이지요.




오늘은 그들을 키워낸 스승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와 넓은 의미의 가족구성원 ( 야코포 벨리니의 사위이자 벨리니의 매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의 작품을 살펴볼까 합니다.







Gentile Belini &Giovanni Belini,<St. Mark Preaching in Alexandria>,1504-1507/wikipedia




벨리니의 화풍은 부친인 야코보 벨리니(Jacopo Bellini)의 영향 아래 시작되었습니다. 페라라 학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 인물의 내면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탁월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한 때 피렌체에 거주하며 그곳의 중요한 화가인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에게서 원근법의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 기술을 통해 아들 조반니는 드넓은 초원의 독창적인 풍경화를 개발하게 되지요. 수세기에 걸쳐 북부 유럽과 베니스 화파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당시 베네치아가 얼마나 화려한 도시였는지 형인 젠틀레 벨리니(Gentile Belini 1429-1507)와 동생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가 함께 그린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형인 젠틸레 벨리니 역시 화가입니다. 그는 대형 공공건물 벽화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예를 들면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의 <십자가 유물의 기적> 연작 등이 있지요. 동방 문화에 관심이 많아 1479년 술탄 메메드 2세의 요청으로 초빙되어 이스탄불에 체류하며 그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안타깝게도 대작 벽화들이 1577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존작품은 많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남아있는 작품들에서 그만의 섬세한 디테일과 사실적 표현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udav6yjqNc









그림1. <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1480/wikipedia 그림2.<Pieta>,1460/wikipedia




출처: Silvia Minguzzi




그림 1. 벨리니의 매부인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 The Lamentation over the Deat Christ>(1480) 작품입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 항해(1432)를 시작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 빈치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꿈꿀 정도로 탐험과 혁명의 기운이 꿈틀대던  시절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그림이지요. 주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거나, 혹은 십자가에 내려지시는 모습으로 그려지던 종교화가 대부분이었지요.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독특합니다. 크고 두툼한 두 발에서 시점이 출발해  단축시킨 몸통을 거쳐 발의 크기와 거의 비슷한 머리가 화면 뒤를 지탱하며 끝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끝을 소실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도로써 원근의 효과를 내려는 화가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작품입니다.





거장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는 15세기 초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과 단축법을 사용하여 사물을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애썼습니다. 그가 시도한 원근법과 투시 기법은  회화에 공간감과 입체감을 부여하지요. 만테냐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았고요.




  단축법이란 단일의 사물이나 인물에 적용하는 원근법으로 대상의 형태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축소시키는 회화 작법을 말합니다. 이러한 기법이 만테냐에게 영향을 미쳐 <죽은 예수 그리스도> 작품이 탄생했고요.  대리석 위에 놓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비정상적인 비례로 보일 겁니다.  하체가 무척 짧게 보이지요. 




반면에 상체는 조각같이 단단한 모습입니다. 손으로 만져 낸 듯 그린 몸에는 살 밑에 있는 단단한 골격이 드러나 있고요. 얼굴의 미간에 있는 깊은 주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신을 덮은 세마포의 주름은 마치 물결치는 듯한 로마풍의 조각을 연상시킵니다. 단색으로 표현되어 있어 회화지만 조각의 느낌이 살짝 풍깁니다.  이로 인해 발과 손등의 못 자국 상흔 역시 도드라지게 보입니다. 만테냐가 진정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이 상처들과 심연의 슬픔을 안은 그리스도의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e20mMzj5Ug





그림 2. <피에타 Pieta>는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초창기 작품입니다. '연민, 자비'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성모 마리아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지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피에타'라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많은 화가들이 다양한 표현을 했지요. 




벨리니의 작품 역시 마리아와 요한이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칼에 찔린 상처와 십자가에 못 박힌 상처가 생생합니다. 세 인물은 중앙 전경에 위치하며, 그들 뒤에 가려진 농촌 풍경이 긴장감을 풀어줍니다. 이 그림은 벨리니가 만테냐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그린 작품입니다. 극적인 것을 가능한 배제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평온하게 다가옵니다. 드라마틱하고 서사가 강한 매부인 만테냐와 그리는 문법이 조금 달랐던 거죠. 





그림 속 의상의 뻣뻣한 직물은 훨씬 더 부드럽고, 더 광범위하고, 주름 잡힌 것으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주변적인 변화가 이미지에 더해져 어머니와 하나뿐인 아들 사이의 감정의 선이 훨씬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눈에 띄는 것 한 가지는 고전적인 주제와 구성을 개인적인 해석으로 주입하는 그의 능력입니다. 마리아와 비교했을 때  다소 건장한 모습의 요한은 예수의 시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시울은 이미 달아올라 있고 목 근육도 부풀어 올라  개인적인 슬픔에 젖어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듯합니다. 마리아의 슬픔이 내면의 슬픔이라면 요한의 슬픔은 밖으로 울부짖는 절규입니다.  열렬한 한 제자의 상실감을 넘어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상실감이 전해집니다. 









그림1. <Ritratto del Doge Giovanni Mocenigo>,그림2.<Portrait of Doge Leonardo Loredan>,1501/wikipedia






형인 젠틸레 벨리니(1429-1507)는 종교화 외에도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초상화를 그리는 전문 초상화가 이기도 했습니다 <그림 1>. 1478-1479년 그려진 그림으로 당시 고귀한 얼굴일수록 정면이 아닌 옆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시대 동전의 초상화 역시 옆얼굴인 것처럼 말입니다.  초상화의 모델이 뭘 생각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네요.




<그림 2>. 동생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가 그린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1501) 초상화입니다.  형이 이스탄불로 초청이 되어 떠나며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머리에 두른 뿔모양의 모자가  참 독특합니다. 주로 고귀한 인물의 초상화는 반신상들로 제작된 흉상이 대분분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팔이 없죠. 마치 로마 제국 흉상들처럼 말이죠. 옥외의 푸른 배경 앞에 놓인 받침대 뒤에 앉아 있는 예복 차림의 총독의 모습 또한  3/4 흉상입니다. 총독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갈색의 받침대 뒤에 그를 배치합니다. 그 받침대 하나가  관람자와 총독이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공간적 깊이를 주는 장치인 거죠. 플랑드르(벨기에, 네덜란드) 초상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달걀을 섞은 템페라 기법(그림 1)이 아니라 유화(기름)로 그려져 있어 총독의 피부를 아주 부드럽고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플랑드르 지역에서 시작한 유화를 조반니 벨리니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해 높은 단계까지 끌어올립니다.  그림 속 (그림 2) 방울의 깊이감도 유화의 미묘한 힘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표현해 입체감이 그대로 드러나게 합니다. 형이 그린 그림(그림 1)과 비교해 모델의 옷 주름의 깊이가 조금 달라 보이지 않나요?




또한 얼굴에 근엄함이 묻어납니다 (그림 2). 베네치아를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니 그 책임감 또한 막중할 테죠.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초상화는 이렇게 기존의 초상화들과 조금 다릅니다. 위엄과 인간미를 동시에 지닌 현명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림 파일에 따라 조금씩 느낌은 다르지만 빛이 비치는 오른쪽은 엄숙하고, 그늘진 왼쪽은 자애로워 보입니다. 미소를 지을까 말까 한 표정 때문이죠.






 이처럼 벨리니의  그림은 자세히 보아야 보입니다. 종이쪽지에 장난스럽게 사인을 해서 공식초상화의 틀을 살짝 깼습니다. 입고 있는 옷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가공한 백색 실크에 석류 무늬를 넣은 최고급 견직물로 짠 옷입니다. 당시 베네치아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부유했는지 알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는 원근법으로 그림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의 양식과 기법은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 1430-1516),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1452-1519), 알브레히트 뒤러(Alberecht Durer , 1471-1528)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차용할 정도였죠. 그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돋보여, 어린 시절부터 유명 화가의 제자로 들어가 일을 배울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의 가 컸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만테냐는 전통에 따라 그림을 작업했습니다. 회화 말고도 그는 다수의 동판화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동판화의 일종의 로 부식과정 없이 판면에 철침으로 직접 그림을 새기는 '드라이 포인트'기법을 개발해 여러 색조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만테냐는 이탈리아 최초의 인그레이빙(금속판에 끌로 직접 선을 새겨 인쇄하는 기법) 작가이기도 하고요. 원근법을 포함한 다양한 그의 기법은 몇 세기를 걸쳐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공간감을 다루는데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림1. <Agony in the Garden>1455-56 /wikipedia 그림2.<Agony in the Garden>,1459-1465/wikipedia





작품 내용은 신약성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올리브 동산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을 산기슭에 남겨두고 홀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1. <겟사마네의 기도 Agogy in the Garden>는  이탈리아 파도바 화파의 천재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그린 종교화 중 가장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만테냐가 만토바공의 궁전화가 가 된 1456년 이후의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제자들이 곯아떨어져 있는 모습, 그들을 쫓는 무리들과 예루살렘성, 그리고 하느님의 사자 어린 천사들을 압축법을 사용한 화면에 담고 있습니다.  만테냐의 그림이 훨씬 극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템페라로 그린 그림으로 그림의 소장자가 17세기 초부터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미술계의 3D 아시죠?(Death, Divorce, Debt) 1894년 노스브르크 백작에게서 현재의 런던 국립 회화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그렸으니 왼쪽 만테냐의 그림과 오른쪽 벨리니의 그림을 번갈아 보며 다른 점을 찾게 됩니다. <그림 2> 벨리니는  만테냐의 왼쪽에 굳건하게 세운 예루살렘 성 대신 당시 베니스 주변 시골에서 발견된 정착촌으로 묘사합니다. 군인들의 행렬을 더 먼 곳으로 배치함으로써 저 멀리 모여드는 폭풍 구름처럼 고요함은 곧 벌어질 다급함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주목할 점은 벨리니가 감질나게 표현한 분홍빛 새벽빛입니다. 강과 바위, 그리고 넓은 계곡으로 물밀듯이 밀려들며 떠오르는 태양의 핑크빛 온기는 주제의 긴장감과 상관없이 아름답습니다. 그 빛은 파랑에 골드를 첨가하여 한층 세련된 찬란함으로 예수의 예복 뒷면에 파문처럼 번집니다. 벨리니는 이런 식으로 빛과 색깔을 계속 활용함으로써 분위기 조성의  달인으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벨리니가 매부인 만테냐와의 경쟁을 피하면서 그가 찾아낸 회화의 방향인 거죠.







https://www.youtube.com/watch?v=LO8M3Aiat90












그림1. < Camera degli Sposi>,1474/Artchive 그림2.<Naked Young Wonan in Front of a Mirror>,1515/wikipedia






<그림 1> 안드레아 만테냐는 만토바의 영주였던 루도비코 곤자가의 주문을 받아 <신혼의 방>이라고 불리는 궁전 침실을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만테냐는 천장에 창을 그리고 그 주위를 풍성한 과일 묶음과 동그란 구명이 뚫린 난간으로 둘러쌌습니다. 진짜처럼 보이지만 전부 그림입니다. 난간 위에는 공작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수풀이 무성한 화분을 나무 막대 하나로 위태롭게 받쳐 놓아서 누군가 건드리면 아래 누운 이의 얼굴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만테냐만의 재치만점 표현입니다.





옛적의 '신혼 첫날밤'치르는 광경처럼 그 옆에서는 웃음을 띤 동네 여인들과 날개를 단 통통한 사내아이들이 침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여인네들 눈초리가 사뭇 날카롭습니다.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식으로 우습기도 하고요. 화가의 유머코드가 살짝 숨겨져 있는 것 같아 보는 이들은 즐겁습니다.



신화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이 아기들은 큐피드처럼 세속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난간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빠지지 않아 울고 있거나 사과를 아래로 던질 듯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천진한 아기들의 장난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다분히 성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금단의 열매였던 사과는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터번을 두른 노예 같은 검은 얼굴도 보입니다. 당시 베네치아의 인구 구성이 무척 다양했던 모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N0P5RkQAow








<그림 2>.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모든 예술적 기법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현재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 Museum)에 소장되어 있고요. <거울 앞의 벌거벗은 여인 Naked Young Woman in Front of a Mirror> 작품은 벨리니의 노년기에 해당하는 1515년에 그려졌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종교적인데 그것과는 별개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방안의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는 나체의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형상은  고전적 여성상을 떠오르게 하고요. 그녀의 어깨 뒤에 걸린 거울에는 풍성한 머리칼을 덮은 망건이 비치며 제법 비싸 보입니다. 





또한  젊은 여인이 값비싼 옷감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녀의 뒤에는 거울이 걸려 있는 짙은 녹색의 벽면이 있고요. 벨리니는 주요 모티브와 풍경에서 같은 색상을 사용함으로써 두 영역을 이어줍니다. 그림이 전체적으로 온화해 보이는 효과를 주고요. 여염집 여인네는 아닐 테고 당시 매춘에도 생계형 매춘과 고급 매춘이 함께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지성과 미모를 갖추고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준 여성들은 대부분 고급 매춘부에 속하는 그룹이었다고 해요. 후원자의 경제력에 따라 지니는 소품 또한 달랐고요. 15-16세기 베네치아가 서양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누드화를 화가들이 많이 그린대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미술시장에서 많이 찾았다는 이야기인 거죠. 




젊은 여자가 오른손에는 또 다른 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거울은 한쪽은 허영(Vanitas)의 상징이고 다른 한 손에는 비너스의 속성인 정숙함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벨리니는 두 거울의 장치를 사용하여 관찰자가 그림에서만 가능한 관점인 하나의 관점에서 여성 머리의 두 가지 관점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게다가 플랑드르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왼쪽 뒷면 창문을 통해 그 지방과 흡사한 풍경과 창틀 위의 투명한 꽃병도 보입니다. 




 


    


 벨리니의 그림은 매부인 만테냐의 그림에 비하면 훨씬 덜 극적입니다.  평온하죠. 김 빠진 맥주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벨리니는 오히려 극적인 것을 가능한 배제 하려 했습니다. 그 자리를 대신 은은한 색으로 채우고 유화를 사용해 빛과 그림자를 중시했지요. 



당시 벨리니의 공방을 통해 집에 모시고 경배용으로 사용할 그림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벨리니가 생각하기에 그림에 서사가 너무 강하면 묵상할 때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작도 많지 않고, 극적인 표현도 없고, 화려하지 않지만 색조의 미묘한 변화만으로도 명상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처럼 그림도 시대를 따라 변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또 다른 사조를 만들어 내고요. 조반니 벨리니의 삶에 매부인 안드레야 만테냐가 미친 영향은 상당합니다. 그의 영향을 벗어나고자 노력했고 그 답을 풍경을 강조하고, 빛과  색조를 통해 답안을 찾습니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만큼 빠른 것도 없다고 합니다.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성장하기 위함이 작가님들이 글을 올리는 또 다른 이유였으면 좋겠습니다. 


# 제목 그림: Andrea Mantegna 1431-1506<성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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