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4-4. 샤프롱과 모노그램

얀 반 에이크& 알브레히트 뒤러

많이 베풀었다고 생각한 상대에게 어느 날 사소한 부탁을 했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냉정한 반응을 보이는 상대.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싶어 설명하자니 구차해집니다. 서운함, 섭섭함이 3쿠션으로 치고 들어 올 때 손절해 버리고 싶어 집니다. 





 서로 원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종종 발생하는 문제이지요. 상대와 텔레파시가 통해 '이심전심'을 바라지만 돌아오는 건 '동상이몽'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 딴것, 꿈깨'하는 반응으로 올 때 심하면 무시당했다거나 희생만 당한다는 피해의식으로 번질 수도 있지요.




자존감이 지하 밑바닥을 헤맬 때, 센서 잘못인데 아파트 자동문마저 나를 인식하지 못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저에 경우도 상대에게 무리해서 뭔가 베풀었을 때 저도 모르게 기대가 커져 3종 세트(구차함+섭섭함+억울함)가 한꺼번에와 속앓이를 할 때가 많았던 것 갔습니다. 




오늘은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자존감 '갑'의 두 남자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1406"




무슨 숫자냐고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Florence)가 피사(Pisa)를 공격한 해입니다.  피렌체가 주변 도시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의 일환이었지요. 당시 이탈리아의 강력한 도시국가들은 주변 지역을 점령하며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피렌체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피사는 오랫동안 독립적인 해양 강국으로 존재해 왔지만, 피렌체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그 독립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정복으로 인해 피렌체의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익 증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모직물업과 은행업들이 주를 이루던 피렌체 유력 가문들은 덕분에 북유럽을 거쳐 전 유럽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풍부한 자원과 인재의 유입, 그리고 해상 무역로 확보로 피렌체는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고요.






서양 미술사에서 약 1400년에서 1600년에 이르는 시기 전체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거의 200여 년을 지속한 르네상스는 다시 초기, 전성기, 그리고 후기로 구분이 되지요. 각각의 단계가 나타나는 시기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지역적인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중세후기 지도/위키백과




르네상스/나무위키







알프스 이남 이탈리아에서는 1400년경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 후 백 년 늦게 시작된 알프스 이북의 르세상스는 약 1500년에서 시작하여 1550년까지 지속됩니다. '르네상스'의 훈풍은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Florence), 베네치아(Venezia: Venice)를 통과해 북유럽으로 북상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미술가로 플랑드르(벨기에, 네덜란드) 지역의 얀 반 에이크 형제(Jan van Eyck, 1390?-1441)와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Alberct Durer, 1471-1528)가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OuO99BljB4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 1441)는  형인 휴베르트 반 에이크와 함께 플랑드르(저지대) 미술을 발전시킨 화가입니다. 특히 휴베르트 반 에이크(1385?-1426)는 아마씨와 린드씨에서 기름을 추출해서 달걀과 안료를 섞어 사용하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형 휴베르트의 유채기법의 발명으로 인해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는 더욱 세밀하고 부드러운 색채감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템페라 기법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행착오를 밥 먹듯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지요. 




유화기법의 마르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을 더 관찰하고 섬세하게 그려 넣을 수 있는 장점으로 바꿔 놓습니다. 색조, 색의 농담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동시에 광택, 반광택, 무광택의 효과, 혹은 불투명, 반투명, 투명의 기법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질감의 표현도 가능하고요. 또한 제작 중의 색과 건조 후의 색의 변화도 없는 등의 장점도 있습니다. 여하튼, 얀 반 에이크의 용기 있는 선택 덕분에 지금도 '유화'의 매력은 순항 중입니다. 





 이후로, 안토넬로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 1430-1479)를 통해 플랑드르의 미술을 접하게 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아름다운 그림 모나리자(1503)의 신비의 미소인 스푸마토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 붉운 터번을 쓴 남자 Portrait of Man, 1433/wikipedia 2. Selr-Portrati, 1500/wikipedia






<그림1>. 얼굴보다 붉은 샤프롱(chaperon;어깨까지 덮는 모자)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나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플랑드르 출신이고요.  후베르트 반 에이크의 동생으로 15세기 북유럽에서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어두운 배경 앞에 3/4 측면으로 앉아 있는 자세입니다.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의 얼굴, 주름진 피부와 약간 충혈된 눈이 특징적입니다. 붉은 터번의  주름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사실적인 느낌까지 더했습니다. 붉은 터번 때문일까요? 인물의 창백한 피부와 어두운 배경이 대비되어 작품에 생기를 더해줍니다. 특히 관람자를 직접 응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이 그림 파일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

"AIs Ich Can"(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라는 문구와 인물의 직접적인 시선 때문에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자화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붉은 터번을 쓴 남자> 작품에서 터번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터번은 당시 사회적 지위와 학식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학자들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붉은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적으로 붉은색은 권위, 부, 또는 고귀함을 상징했습니다. 





이 작품이 반 에이크의 자화상으로 여겨지는 점을 고려하면, 붉은 터번은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예술적 권위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터번의 정교한 주름과 질감은 반 에이크의 뛰어난 기술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고요. 이는 화가의 능력을 강조하고 현실감 있는 묘사를 통해 관람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색으로 
나 자신을 묘사하였다.
-자화상 오른쪽 문구 내용-




독일 뉘른베르크/매일경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 1471-1528)가 태어나고 활동한 뉘른베르크(Nurnbreg)입니다. 이곳은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한 당시 신성 로마제국 최대 도시인 쾰른 다음가는 규모의 도시로, 인문주의를 비롯한 학문, 인쇄, 항해와 천문 도구 개발을 중심으로 한 과학 기술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뒤러는 제단화, 종교화, 초상화, 자화상, 판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례론과 원근법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던 다재다능한 화가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수학적, 논리적인 원근법과 표현을 북유럽 특유의 섬세한 표현을 결합하여 이탈리아와는 확연히 다른 북유럽 스타일 르네상스 미술을 보여줍니다. 






<그림2>.<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자신의 29번째 생일 직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작가의 3개의 자화상 중 이 작품이 가장 개인적이고, 상징적이며 복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초기 표현과 매우 유사하여 가장 주목받는 작품입니다.  종교화에서의 관습과 균형성, 검은 톤, 그리고 작가가 관람객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강복처럼 축복을 주는 모습이 연상되는 가슴 한가운데까지 손을 들어 올리는 자세가 독특합니다. 




이전의 자화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뒤러의 얼굴은 이마를 중심으로 하여 정확히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얼굴은 단호함과 위엄을 지니고 있어 보입니다. 뒤러가 생각하기에 '르네상스'적 화가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이런 모습이었나 봅니다. 빛나는 이마는 뛰어난 지성을 , 눈은 화가의 관찰력을 , 손은 훌륭한 솜씨를 만들어내야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뒤러 자신이 바로 그런 화가라는 말이고요. 자칫 잘못하면 자만심 가득한 젊은이로 비칠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평생 자신의 삶으로  르네상스형 지식인임을 보여주고 살았습니다. 




작가가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관람객과 대면하는 방식은 이전의 자화상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또한 종래의 배경 처리 방식과 다르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톤의 배경은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뒤러 자신을 내보이려는 듯 보입니다. 




뒤러 자화상 왼쪽과 오른쪽 배경에 쓰여 있는 모노그램(AD)과 명문의 배치는 마치 공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초상화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검은 배경에 맞추어 갈색 톤의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작가의 이전 두 자화상에서 보이는 붓터치와 사뭇 다릅니다. 무엇보다 정면을 응시하는 포즈는 그리스도만 가능했던 포즈입니다. 감히 한 개인이 정면포즈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자의식의 성장으로 그만큼 화가로서의 자존감이 높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13세 자화상, 1484, 동판화 2. 1493(22살),유화 oil on panel /wikipedia



3. self-portrait, 1498(28살), oil on panel/ wikipedia







거울 기술의 발전으로 화가들은 더 정확하고 상세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자화상에도 반영되어, 화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단순한 자기 묘사를 넘어 화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요. 




뒤러의 자화상들입니다. 

1. <13살의 자화상 selr-portrait at the Age of 13> 작품은 연필 이전의 은첨필로 (Silver point)로 한 소묘입니다. 알베르니티나 미술관 (Graphische Sammulung Albertina), Vienna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2. 엉겅퀴를 들고 있는 자화상(Portrait of the Artist Holding a Thistle)으로 약혼 초상화(Brautportrat)입니다.  캔버스에 붙인 양피지에 그린 유화로 1493년 제작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중 가장 이른 시기 만들어졌고요. 식물학자에 의하면 손에 들린 식물은 에란 지움 아메치스(eryngium amethystinum)라 불리는데, 부부간에 있어 남자의 신의와 정절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3.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입니다.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뒤러의 자화상 회화 작품입니다. 곱슬한 금발머리, 연극배우 뺨칠 정도의 외모, '나, 요즘 잘 나가.' 하며 한 껏 멋을 낸 뒤러. 디테일 강한 옷차람과 비싼 장갑으로 마무리까지 존재감 확실히 드러냅니다. 원근법을 살린 배경 묘사가 작품을 더 멋스럽게 합니다. 





뒤러는 스스로를 이탈리아 여행과 인문적 학식을 겸비한 신사로서 묘사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뒤러는 정면을 응시하는 자화상을 통해 일개 손재주나 부리는 공방쟁이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창조력과 사고할 줄 하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임을 소리 높여 외치고 싶어 했습니다. 











1. Madonna of Chancellor Rolin, 1435/ wikipedia 2. Feast of the Rosary, 1506/wikipedia





1.얀 반 에이크의 <대법관 롤랭과 성모 The Madonna of Caancellor Rolin>(1435)는 유화 작품으로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왼쪽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푸틴을 살짝  닮은 니콜라 롤랭 대 법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작품의 후원자 대법관 롤랭은 부르고뉴 공국에서 최고 실력자이자 부자였습니다. 롤랭의 고향 프랑스의 오툰(Autun)에 위치한 가족 예배당에 보낼 목적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롤랭 자신이 후원자로 구원의 열망을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이고요.





 보통 그림의 후원자들 모습이 성인보다 작게 그리는 게 특징인데 롤랭은 자신을 성모자와 같은 공간, 같은 크기로 그려졌습니다. 신과 인간을 중재하는 수호성인도 없고요. 직접 성모자와 대면하고 아기 예수로부터 축복받는 장면입니다. 




왼쪽의 헌신적인 기도 자세와 달리 롤랭의 옷차림은 붉은 옷의 성모마리아보다 더 화려합니다.  뚜렷한 개성이 드러난 머리, 유화의 미세한 붓터치로 섬세하게 새겨진 작은 세부 사항들. 총리 니콜라 롤랭의 초상화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롤랭의 지위를 증명이라도 하듯  벨벳으로 덮인 의자에 기대어 롤랭의 기도하는 자세는 사뭇 근엄하지만 교만한 모습도 보입니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사용했습니다. 강을 기준으로 세속적 부분을 의미하는 왼쪽풍경의 부산한 움직임과 영적인 의미의 강가의 풍경이 명확한 구분으로 대조를 이룹니다. 그림 속 롤랭수상은 같은 공간에 그려졌지만 마리아와 아기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강을 가운데 두고 서로 다른 현실에 속해 있고  살고 있다는 얘기지요. 롤랭수상은 지상의 영역의 존재로 육체적 현존하는 인간인 반면, 신적인 인물들인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천상의 영역에 속해있습니다. 






wikipedia




 멀리 발코니의 두 남자 중 붉은 터번을 머리에 쓴 남자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로 추정됩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수상의 뒤쪽으로는 그가 부르고뉴에 소유한 포도원을 연상시키는 언덕, 작은 성당, 광장 등이 보입니다. 좁은 다리 위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요.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좁은 골목에서 걷고 있습니다. 풍경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들은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져 마치 '인간 사진기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앞 뜰에는 성모 마리아의 미덕을 상징하는 백합, 장미, 데이지, 작약 등을 그려놓았습니다. 아기 예수 뒤편은 고딕 대성당과 첨탑이 밀집한 대도시가 펼쳐져있습니다. 롤랭수상 뒤 풍경은 물질을 상징하는 지상의 세계이고, 아기 예수 뒤편은 천상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들 근처에는 까치 두 마리와 공작 두 마리가 있어 전자는 부도덕과 자존심의 상징으로 롤랭같은 사람을 표현합니다.  공작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고요.






 기둥에 새겨진 귀한 대리석에는 아담과 이브의 추방, 아벨의 죽음, 노아의 모습 등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1480, Andrea Mantegna(1431-1506)/wikipedia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4-95년, 1505-07년 두 번 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릅니다. 1495년 뒤러는 베니스를 떠났고 그곳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를 만났습니다. 뒤러는 만테냐의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의 유화 기법을 연구했습니다. 



San Zaccaria Altarpiece, 1505, Giovanni Bellini(1430-1516)/wikipedia




뒤러는 또 다른 베네치아 예술가인 지오반니 벨리니( Giovanni Belin, 1430-1516)의 예술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와 함께 여러 프로젝트에서 작업했습니다. 베니스에 있는 동안 뒤러는 유화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판화와 동판화를 제작했습니다. 뒤러는 1495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후 계속해서 고품질의 예술 작품을 제작하여 유럽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2. 뒤러가 1506년에 그린 , <장미 화관의 축제 Feast of the Rosary>는 독일 작가 특유의 세부 묘사에 이탈리아적인 인체 묘사가 어우러진 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작입니다. 아기 천사들이 받쳐 들고 있는 초록색 장막 아래에 성모님께서 푸른 옷을 입고 옥좌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작은 구름을 탄 아기 천사들은 성모님의 머리 위에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천상 모후의 관을 들고 있고요. 의자에 앉아 계신 성모님의 무릎에는 아기 예수님이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자세와 통통한 살점의 표현, 그리고 성모님의 옷 주름을 통해 드러나는 인체의 굴곡에서 뒤러의 르네상스적 회화의 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 중심에는 성모님의 좌우로 무릎 끓고 있는  율리오 2세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왕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모님은 황제의 머리에 장미 화관을 씌워주시고, 아기 예수님은 이와 똑같은 장미 화관을 교황의 머리에 씌워주려 합니다. 교황 발치에는 세속 권력을 상징하는 황제의 왕관이 있는 데 , 교황과 황제는 화려한 관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장미 화관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1500년 당시 유럽의 최고 권력인 교황과 황제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보게 됩니다. 아비뇽 유수와 교회 대분열 등의 사건으로 교황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던 시기입니다. 국왕과 제후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고요. 종교개혁의 전조현상들이 쌓여가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교황과 황제의 뒤편에 각각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은 베네치오 로사리오 형제회 설립자와 이 그림의 후원자들로, 시선이 모두 성모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편에  몇몇은 시선을 딴 데로 두고 있네요. 특히 오른쪽 나무 아래 흰색 종이를 들고 서 있는 금발 머리 남자가 바로 뒤러입니다. 





그 종이에는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5개월 만에 그렸음. 1506년 서명"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푸른 바위산의 풍경도 이탈리아에서 배운 원근법입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이 작품을 더욱 자연스러워 보이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작품 속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밑에는 류트를 연주하고 있는 천사도 보이네요. 이 장면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가 1505년에 베네치아 산 즈카르야 성당에 그린 벽화와 비슷합니다. 뒤러는 장미 화관을 쓰고 봉헌과 구원의 축제 분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Ghent Altarpiece, The twelve interior panels(open view)/ (closed view)/ Jan van Eyck






형 후베르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 1370?-1426)가 시작하여 동생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가 완성한 <겐트 Ghent 제단화>(1432)입니다. 일명 <어린양의 경배> 또는 <신비의 어린양>으로 불리는 참나무 12폭 작품입니다. 5세기 초 플랑드르 지역 헨트(겐트) 시 성 바봉 (Saint Bavo) 성당의 가족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시장 요스 베이트(Joos Vijd)가 반 에이크 형제에게 주문하여 제작했습니다. 





겐트 제단화(Ghent Altarpiece)는 1432년에 완성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대표작으로, 초기 네덜란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입니다. 대형 다폭 제단화로, 여러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고 닫을 수 있지요. 중앙 패널에는 '신비의 어린양 경배'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겐트 제단화의 열린 화면의 그림은 도상학적 의미가 복잡합니다. 화면(365*515cm)은 천상과 지상 2단으로 나뉩니다.  하단 다섯 폭이 <어린양의 경배>입니다. 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었으나 중세 시대 미술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이름을 따라 잘 따라오십시오. 왼편부터 열두 폭을 순서대로 서술하면, 아담-노래하는 천사들- 마리아-하느님-세례자 요한 -연주하는 천사들- 이브 순입니다. 중앙 인물을 예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바로 아래 <어린양의 경배> 위쪽 반원의 성령(비둘기)과 연결시켜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닫혔을 때는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단에는 봉헌자 요스 베이트-세레자 요한-사도 요한- 이사벨 보루트, 가운데는 수태고지로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 마리아, 상단은 선지자 즈카르야-이교도 무녀 에리트 레이와 쿠마이 -선지자 미가 등 한 폭, 한 폭이 마치 개인 초상화처럼 그려졌습니다. 





 여러 전쟁과 수난을 겪었지만 대부분 원형이 보존되어 있어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점령군에 의해, 2차 세계 대전 내내 소금 광산에 부주의하게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1945년 연합군 미술 전문가들에 의해 구조되어 패널을 다시 조립, 세척 복원했습니다. 원래 12개 패널 중 하나만 손실된 상태입니다 (제단화를 열었을 때 왼쪽 아래에 있는 '정의로운 재판관' 패널). 제단화가 여러 번 분해되었다가 조립되어 원래 구성으로 조립했는지에 대한 의견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아무튼 수많은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준 제단화에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셈세한 세부 묘사, 풍부한 상징성, 혁신 적인 기법으로 인해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작으로 여전히 엄지 척입니다. 




#풍성한 이해를 돕기 위해 < You tube1,2편>을 함께 실었습니다. 훨씬 재미있을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dgNvPpDb2I



https://www.youtube.com/watch?v=JVhwinCiELI&lc=UghZ_N8m0a9NU3gCoAEC









독일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판화를 미술의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사용한 첫 번째 화가입니다. 간접예술인 판화는 '판'을 매개물로 하여 종이 등의 평면에 이미지를 찍어 낸 그림을 말합니다. 이런 판화는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소수 엘리트들이 많이 향유하던 문화 예술이었습니다. 그런 판화를 뒤러가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게 예술의 대중화에 힘씁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원인도 그의 판화 작품 덕입니다. 그는 빽빽한 선을 사용하여 판화에서 유화 못지않은 세밀한 질감과 색조를 묘사해 냅니다. 






The Four Horsmen of the Apocalypse, 1498, 목판화 /wikipedia






알브레히트 뒤러의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1498)는 목판화 작품으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연작 중 하나입니다. 야콥 헬러(Jakob Heller)의 의뢰로 그의 개인 예배당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초기 교회 시대의 로마 제국 하에서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책입니다. 다양한 상징과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종종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여겨지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 세상 마지막 때의 사건들과 심판, 악의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새로운 세상의 도래 등을 담고 있습니다. 뒤러가 이 작품을 만들어 낸 시기도 15세기 말로 종교적으로 갈등이 심하던 때입니다. 






< 요한 계시록> 6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으로, 네 명의 기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각 기사는 재앙, 전쟁, 기근, 죽음을 상징합니다. 활을 든 정복자로 재앙(역병), 검을 든 전쟁, 천칭을 든 기근, 마지막으로 바싹 마른 말을 탄 죽음입니다.  죽음의 뒤를 따르는  끔찍한 괴물, 공포에 질려 서로 뒤엉켜 있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집어삼키는 용. 하필이면 성직자가 1번 타자네요. 죽음은 신분을 따지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뒤러는 이렇게 성경 구절을 극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해석했습니다.  이들은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로, 세계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 (묵시록) > 독일어 번역본 혹은 라틴어본에 있는 표지를 제외한 총 15개 판화 가운데 다섯 번째 도판에 해당합니다. 뒤러의 요한 계시록 판본은 역사적으로 예술가에 의해 디자인되고 편집된 첫 번째 서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출판인으로 기능했던 가장 첫 번째 알려진 예이고요. 





1498년 첫 인쇄 당시 뒤러는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와 함께 일반적으로 통용어인 라틴어 판본을 동시에 출판했습니다. 이전 독일에서는 라틴어 판본은 출판되지 않았다고 해요. 뒤러가 예배 목판화를 두 개의 언어로 모두 출판한 것은 의도된 선택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성대한 제단화나 주문 초상 등은 부유한 귀족층이나 성직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던 매체였습니다. 교회와 공공장소에 비치되더라도 아주 특별한 일정에 드물게 접할 수 있었죠. 이에 반해 , 판화의 주된 소비 계층은 일반 대중입니다. 적은 돈으로 살 수 있어 일반 평신도와 중산층을 중심으로 대박이 납니다. 평생 수입원을 보장받을 수 있을 만큼요. 그것도 27살 20대에 말입니다.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났던 알브레히트 뒤러입니다. 





뒤러의 섬세하고 정교한 판화 기술이 이 작품에서 잘 드러납니다. 복잡한 구도와 세밀한 표현의로 말이죠. 화면은 선으로 빼곡하게 메워져 그 가운데 빛과 그림자의 음영 표현과 서로 다른 천의 질감까지도 명확하게 구분하였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말의 갈기까지 마치 붓을 사용하여 다룬 것처럼 자유자재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묘사된 대상들은 원근감과 입체감이 안정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나타나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 작품이 '목판화'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섬세함에 놀라게 됩니다. 헝가리에서 이민 온 금세공업자 장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어려서부터 목판과 금속판 세공 기술을 배운 공방에서의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테지요. 

 









뒤러는 대량 인쇄 매체로서의 판화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지금도 그의 판화작품마다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모노그램(화가의 이름, 알파벳 첫 글자인 A와 D를따서 만든 결합문자로)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상표(trademark)나 로고 (logo)와 그  개념이 통합니다. 그는 자신의 판화 판매 촉진을 위해서 자기 PR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AD모노그램이 무단복제로 남용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법의 선구자이기도 하고요. 






전쟁, 화재, 소실 등을 거친 오랜 역사 끝에 오늘날 과연 뒤러가 생전 제작했던 회화며, 드로잉, 판화 작품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될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약 400점의 회화 및 드로잉, 판화작마다 AD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는 점과, 생전 화가가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작품들을 철저히 수집 관리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뒤러는 분명 자신의 천재성과 작품이 후대에 전해질 영향력을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 인쇄본과 복사본들은 훗날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선배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놀라운 기법과 구도를 배우고 본뜨는 데 사용한 표본으로써 그 구실을 톡톡이 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3DmiEsvs6U















1. 수태고지  The Annunciation, 1433-1435/wikipedia 2. 뒤러의 코뿔소( Dure's Rhinoceros), 1515,목판화/wikipedia





1.얀 반 에이크(Jan van Eyck)의 주된 특징인 세밀화의 근간을 이루는 <수태고지> 작품입니다. 그림의 내부뿐 아니라 외부 그리고 입고 있는 옷자락에 있는 실 한 올 한 올에도 정성을 들여 그린 그림입니다. 이렇게 세밀화로써 그리다 보니, 소실점에 의한 원근법 차원을 벗어나 자연스럽게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볼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자유(grisaille)"라는 기법입니다. 회색조의 색채만을 사용하여 그 명암과 농담으로 그리는 화법이지요.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모델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 조각 작품을 닮게 그리는 데 응용되었고요. 




A4용지 사이즈로 두 개의 패널로 제작되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몇 번씩 이리저리 돌릴 정도로  조각상 느낌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 우리의 눈에 더 강렬한 이미지로 그림의 형태가 남게 하기 위해 천사와 성모의 발아래를 보면 액자의 첫층에도  그림을 그려 넣어  더욱 입체감 있는  형태를 보이게 했다는 점입니다.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세상의 구원자"를 낳을 것을 처녀인 성모님에게 알리는 장면입니다.  당황하지 않고 하늘의 뜻을 수긍하는 성모의 놀라움은 얼굴에 드리워진 의연함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굳건한 결의가 묻어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jbwz6B5pV0









2. 알브레히트 뒤러의 "코뿔소 (Rhinoceros)'작품은  목판화 중 하나입니다. 151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뒤러가 직접 코뿔소를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 낸 놀라운 예술 작품입니다. 






뒤러는 포르투갈에서 인도로 보내진 코뿔소에 대한 스케치와 설명을 바탕으로 이 목판화를 제작했습니다. 그의 상상력과 뛰어난 관찰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다른 유럽인들에게 신비로운 동물인 코뿔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뒤러는 코뿔소의 피부를 마치 갑옷처럼 표현했고, 등에 비늘  같은 무늬를 더했습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뒤러의 뛰어난 기술과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코뿔소" 목판화는 뒤러의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인들의 이국적인  동물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 Madonna in the Church, 1438-1440/wikipedia 2. The Four Apostles, 1526/wikipedia







1. 얀 반 에이크( Jan van Eyck, 1390?-1441)의 <교회 안의 성모  Madonna in the Chirch>(1438-1440) 작품입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 내부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국의 여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크기가 주변 건축물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지요. 이는 비잔틴 성모 도상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작품이 제작된 15세기는 고딕 양식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적,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딕 건축은 중세 기독교 세계관을 구현하는 메타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이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그녀의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얀반 에이크(Jan van Eyck)는 성모 마리아의 신성함과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로 들어오는 빛의 표현이 뛰어납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중심인물에게 비치는 빛은 기독교 신앙에서 두드러진 종교적 인물로서의 그들의 거룩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성당 후면의 조각에는 마리아의 생애 장면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벽감에는 유사한 자세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 조각상이 있어 마치 그 조각이 살아난 듯한 느낌을 줍니다. 패널의 좁은 폭과 그림의 경계를 넘어서는 성모마리아의 시선은 이 그림이 원래 하나가 더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보통 기부자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자세로 말이죠.












2. 알브레히트 뒤러의 <네 명의 사도 The Four Apostles>는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1526년에 완성된 패널화입니다. 부싯돌 역할을 했던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양초 역할을 해 주었던 보헤미아(체코) 출신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 그리고 그의  희생을 발판 삼아 횃불처럼 번져 갔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럽에서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변화, 특히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시기를  살았던 화가입니다.  뒤러의 예술적 성숙도와 르네상스 정신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실물보다 큰 크기로 묘사된 네 명의 사도들을 그렸습니다. 뒤러의 뛰어난 기술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그의 화가로서의 능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뒤러의 종교적 신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랐던 네 명의 제자들은 각자의 상징물을 들고 어둠 속에서 정면을 향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는 네 명의 사도들은 서로 닿을 듯이 가까이 서서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들 사이의 그 어떤 소통도 없어 보입니다. 그저 각자의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이것은 네 명의 사도에 대한 뒤러의 의견으로 보입니다. 각각의 인물에 대한 뒤러의 연구를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펼친 책을 읽고 있는 요한, 고개를 떨궈 사색에 빠진 베드로, 우리를 매섭게 응시하고 있는 바오로, 그리고 눈을 돌려 멀리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마르코.  "사크라 콘베르자치오네 (Sacra Conversazione:영어 Secret Conversation)"의 '성스러운 대화'라는 뜻으로 말없이 말이 통하는 종교적 소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세 제단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입니다. 






뒤러가  그려 낸  네 명의 사도들 얼굴에는 각각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책을 펼쳐 미동도 없이 읽기에 빠져있는 요한의 차분함, 호전적으로 거침없는 강한 인상을 내뿜고 있는 바오로, 예수 사후 최초의 복음서를 저술한 마르코의 표정, 예수가 믿었던 단단한 바위 같은 성품의 베드로가 그림에서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큼직하고 움푹 들어간 골을 형성하고 있는 바울의 옷을 보면 아직은 고딕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물 개개인의 개별적인 인상과 정확한 인체의 비율은 과학적이고 이상적인 르네상스의 영향이 스며 있습니다. 



 




이 작품은 뒤러가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독일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독일 미술의 아버지', '서양 최초의 국제적인 예술가'라는 꼬리표가 괜히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yNqLrb0LRE









"유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얀 반 에이크 그림은 유난히 상징이 많이 들어 가 있습니다. 15세기 초 당시만 해도 문맹률이 높았지요. 글자보다 그림으로 성경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더 쉬웠으니까요. 한정된 그림 안에 원하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넣으려니 치밀하게 숨은 그림 찾듯 상징을 많이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기만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이고 치밀한 작품을 보며, '이렇게 까지...'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남다른 자의식을 지닌 섬세하고 치밀한 남자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그가 자주 그림에 삽입했던 문구를 통해 그의 겸손함과 강렬한 손길을 느낍니다. 



I DO AS I CAN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 얀 반 에이크-




알브레히트 뒤러는 친구이자 뉘른베르크 출신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인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 1470-1530)와 평생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갑니다. 그는 철학, 인문, 미술에서 변방이나 다름없던 북유럽에 르네상스를 전달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기능장이 아닌 자의식 강한 예술가로 한층 업그레이드시켜놓았습니다.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 높았던 그들의 삶을 잠시나마 묵직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소제목 그림 < Knigt, Death and the Devil> , 1513/wikipedia





 



작가의 이전글 14-3. 예술의 쓸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