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서로 다른 시대의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 놓습니다.
책은
우리를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되는 겁니다.
-책의 마법(칼 세이건)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이 했던 '책'에 관한 내용입니다. 미국의 천문학자였던 그는 과학의 대중화를 목표로 <COSMOS>를 썼지요. 1980년에 출간한 책으로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다룹니다. 복잡한 과학 개념을 쉽게 설명하며 문턱을 낮추고 , 독자들을 우주의 신비로운 여정으로 초대한 책이기도 하지요. 'COSMOS Kids'세대가 있을 정도로 당시 영향력이 컸던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문학, 우주과학, 철학, 역사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 책입니다. 인간의 인식과 놀라움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고요. 이과생들에게 필독서로 , 문과생들에게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임을 알아챘을 때 삶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한 책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책이기도 합니다. 과학책이라 생각하고 입문했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나름의 깨달음을 건져 올 릴 수 있도록 감동 포인트가 다양한 인생책이기도 합니다.
'화성 탐사'라는 말을 자주 듣는 요즘, 당시 낯선 주제들을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은 이미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의 책 <COSMOS>는 인류가 지구를 넘어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우주 탐사와 외계 생명체 탐색에 대한 세이건의 관심과 기여도 이 책에서 다뤄집니다. 이 책은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궁금한 모든 사람들에게 길잡이 같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묵혀서 먹는 장맛이 깊은 것처럼 세월을 두고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할수록 미쳐 보지 못한 내용들이 시야를 자극할 겁니다.
경계 넘기를 했던 두 예술가를 살펴봅니다.
네덜란드의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umus Bosch, 1450-1516)&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입니다.
벨라스케스 (Vela'zquez, 1599-1660)가 죽은 뒤 스페인은 유럽 미술계에서 거의 유명무실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몇몇 화가들이 벨라스케스가 일구어낸 서유럽 르네상스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이었죠. 그러나 변혁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납니다. '미술사의 전환'을 이끌어갈 주인공이 변방 스페인에서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변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입니다. 후대 미술가들은 스페인 동북부 시골 출신의 이 화가가 '근대 미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스페인 아라곤주 푸엔데토도스( 사라고사 Zaragoza)/위키백과
1746년 스페인 아라곤주 푸엔데토도스(사라고사 Zaragoza 인근 소도시)에서 금도금 업자의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0대 시절 가족과 함께 사라고사로 넘어가 14살 때 호센 루잔 마르티네스(Jose Luzan Martinez)라는 화가의 도제가 되어 미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4년 동안 도제로 일하면서 이후 같은 공방 도제이자 미래의 궁정화가 프란시스코 마이유(Francisco Bayeu)와 친분을 만들어, 1763년 그를 따라 마드리드로 이사가게 됩니다.
마드리드 , 스페인/매일경제
1763년 마드리드에 들어와 프란시스코 바이유 밑에서 일을 하면서, 미술 대회 입상을 노려보지만, 두 차례 낙방합니다. 짐 싸들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탈리아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파르마 아카데미(Academy of Parma)에서 주최한 미술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여 본인이 고대하던 입상을 하게 됩니다.
고야는 1771년 사라고사로 돌아와, 수도원과 성당의 프레스코화장식을 맡으면서 사라고사에 돌아온 프란시스코 바이유의 도제로써 미술공부를 이어가게 됩니다. 1773년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 호세파와 결혼하게 됩니다. 혼테크 덕분에 왕립 미술학회 회원이었던 베이유의 도움으로 1775년경부터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 스페인 왕궁에 보낼 테피스트리(tapestry) 삽화를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테피스트리(tapestry)는 두꺼운 천 위에 수를 놓아서 만든 장식으로 벽이나 창문에 설치하여 겨울 같은 날에 방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엘 에스큐리알과 엘 파르도 궁전의 테피스트리 제작에 참여하여 5년 여 간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게 됩니다. 고야는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실 미술학회의 회원이 됩니다.
The Parasol, 1777, Francisco Goya(1746-1828)/wikipedia
이 작품은 고야가 왕립 테피스트리 공장에서 일할 때 제작한 것으로, 당시 스페인 사회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우아한 젊은 여성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모양입니다. 그 옆에 비슷한 또래의 남성 동반자가 초록 양산을 펼쳐 아가씨의 얼굴을 보호해 주는 모습입니다. 신분차이가 좀 있어 보이지요.
< The Parasol>은 고야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이 시기 고야는 스페인 귀족과 왕족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장면을 담은 그림들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로코코 양식: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예술 양식으로 , 주로 귀족층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양식은 곡선적이고 섬세한 형태, 정교한 장식, 그리고 밝고 화려한 색채가 특징입니다. 로코코는 주로 실내 장식과 회화에서 두드러지며,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복잡한 패턴과 비대칭 디자인을 사용했습니다. 로코코 예술은 관능과 쾌락을 주제로 하며, 바로크의 화려함과는 다른 가벼움과 우아함을 추구했습니다.
그림좌.Christ Carrying the Cross, Ghent, 1516/wikipedia 그림우. St. Bernardino of Siena Preaching to Alfonso V of Aragon, 1782-1783/wikiArt
중세인들은 대부분 태어난 도시에서 살다 그곳에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봉건사회의 특성상 인적 종속관계를 이루고 있었죠. 여행이 오늘날처럼 안전하지도 않았고요. 오늘 살펴볼 히에로니무스 보스 (Hieronymus Bosch, 1450-1516)는 14-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입니다. 환상적이고 독특한 그림체가 특징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을 소름 끼치게 표현했죠. 그래서인지 '지옥의 화가', 혹은 '악마의 화가'로 불립니다.
네덜란드 북부의 브라반트 주의 스헤르토 헨 보스('s-Hertogen Bosch)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생을 그곳에서 자라고 거기서 죽었기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요.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던 화가입니다. 종교제단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공상적인 반인반수의 짐승들을 묘사한 그림으로 더 유명합니다. 또한, 그의 기괴한 그림과 풍자는 네덜란드 속담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설교서에 삽화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 좌).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umus Bosch , 1450-1516)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Christ Carring the Cross >(Ghent,1516) 작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작품이고요. 같은 제목의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비엔나, 마드리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 작품들이지요. 그는 종교적 주제를 독특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알파벳 'X' 형태를 떠올리며 보세요. 중앙 부분에 그리스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주변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고요. 인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수선해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보스 특유의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제스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벨기에 Ghent(1516)에 설치된 작품으로 대상에 바짝 밀접하여 주인공들의 머리만으로 구성한 대담한 구도입니다. 1500년대 예술에서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화풍이지요. 이런 경향은 일반적으로 보쉬(Bosch) 후기의 작품들에서 발견됩니다. 그림 오른쪽 윗부분 보시면 사형당할 죄수(1)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얼굴이 잿빛입니다. 험상궂게 생긴 아래쪽 죄수(2)는 놀려대는 군중들을 향해 성난 모습이고요. 이 소란 중에 예수님만이 조용히 눈을 감으신 채 침묵해 계십니다.
십자가 뒤쪽을 소리 없이 받치고 있는 자칫 놓치기 쉬운 어둠 속 남성 한 분이 보이시나요. 얼떨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메고 간 시몬입니다. 왼쪽 아랫부분 폭도에 둘러싸여 있는 성스러운 여인 (성 베로니카, St. Veronica)의 맑은 옆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천에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얼굴 형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중세시대 정면 초상화는 오직 그리스도만 가능했 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림에 응용하는 선과 악의 대조적인 모습은 보쉬(Bosch) 인생의 기독교 신앙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벨기에 겐트 작품은 인간의 얼굴 표정과 악마의 얼굴을 비교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결과물입니다. 중앙에 있는 그리스도의 온화한 표정을 통하여 난폭한 대중들의 악마적인 표정과 대조시킴으로 써 사건의 "평온"을 강조하고 있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림 우). 이 그림은 고야가 스페인 왕실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던 초기에 그린 것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성인 시에나의 베르나르도가 아라곤의 알폰소 5세 앞에서 설교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 역사적 순간을 웅장하고 극적인 구도로 표현했습니다.
고야의 초기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화려하고 세련된 기법이 돋보입니다. 특히 인물들의 의상과 배경의 세밀한 묘사, 그리고 빛고 그림자의 효과적인 사용이 눈에 띕니다.
또한, 고야가 종교화와 역사화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화가임을 보여주며, 그의 예술적 재능과 기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덕분에 고야가 스페인 왕실의 인정을 받고 궁정화가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 Hieronymus Bosch, 1500/ wikipedi
보스(Bosch)의 중기 작품 시기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로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 중인 작품입니다. <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The Seven Deadly Sins the four Last Things> 작품은 인간이 일상 속에서 범하는 일곱 가지 대죄를 사소한 장면 속에서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원형 중앙에 위치한 예수의 그림은 '신의 눈'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작품의 관람자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미지(동공을 상징)를 두르고 있는 금색 글자 보이시나요. 라틴어로'CAVE CAVE DEUS VIDET(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느님이 지켜보신다.)'라는 뜻입니다.
위쪽으로 '죽음 (왼쪽)', 최후의 심판(오른쪽), 아래쪽으로 '지옥(왼쪽)', '천국(오른쪽)'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죽음 이후의 심판과정을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에서는 '일곱 가지 큰 죄 (칠죄종)를 주요 악덕으로 구분합니다. 일곱 가지 죄는 그 자체가 죄이며 인간이 자기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로서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일컫습니다. 화가들은 미술작품에서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큰 죄들과 함께 비겁함과 변덕, 우둔함과 무지, 간통과 부정, 우상 숭배 등과 같은 것을 더해 악덕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죄의 근원을 동시대의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자세히 묘사해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고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거대한 회전 룰렛처럼 둥근 판이 위치해 있습니다. 도넛 판은 7개의 죄를 의미하는 그림들과 죄명이 나뉘어 있고요. 12시 방향을 보시면, 폭식과 과음을 의미하는 gula 영역에는 술을 병 째 마시는 사람, 못마따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음식을 나르는 여인, 그리고 투실한 아이가 음식을 달라고 보채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2시 방향으로 나태, 게으름을 의미하는 acedia 영역에는 벽난로 앞에 앉아 만사가 귀찮은 듯 눈을 감고 쉬고 있는 사람과 앞에서 기도를 권하는 수녀가 서 있습니다. 졸고 있는 그가 신앙적 의무를 지키지 않고 있음을 묵주를 들고 있는 수녀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wikipedia
3시 방향, 욕망, 쾌락, 사치를 의미하는 luxuria 영역에서는 두 커플이 분홍색 텐트 안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네요. 그 앞에서 광대들이 연극을 선보입니다. 5시 방향, 오만함을 의미하는 supervbia 영역에서는 악마가 비춰주는 거울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이 보입니다. 허영에 차 새로 산 모자를 보며 감탄하는 여성을 통해 오만을 나타냅니다. 6시 방향, 분노를 의미하는 ira 영역에서는 술을 취해 칼을 들고 싸우는 두 남성과 이를 말리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8시 방향, 시기와 질투를 의미하는 invidia 영역에서는 노예를 부리고 매를 키우는 한 남성을 보며 시기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10시 방향, 마지막으로 탐욕을 의미하는 avarcia 영역에는 소송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 뒤에서 다른 손으로 뇌물을 받고 있는 한 판사가 보입니다.
동그란 원 위 아래쪽으로 각각 문구가 적힌 띠가 보입니다. 이 띠에는 신을 저버린 인간들이 신의 눈길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적혀있습니다.
' 이 생각 없는 민족, 철없는 것들아, 조금이라도 슬기로웠더라면 알아차렸을 터인데. 저희들이 장차 어찌 될는지 깨달았을 터인데' /'그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결국 어찌 되는가 두고 보리라.'라고 적혀있다고 합니다.
그림좌. The Wayfarer, 1500-1502, Artchive 그림우. The Duke&Duchess of Osuna &their children/ wikipedia
(그림 좌).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작품 < The wayfarer>입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하던 톤도(이탈리아 :tondo, 둥글다)로 목판에 그려졌습니다. 톤 도는 원형으로 그려진 회화나 부조를 말하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 새겨진 예로 고대부터 있었습니다. 특히 중세 말기부터 15-16세기 이탈리아에서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팔각형으로 표구를 한 흔치 않은 모양입니다.
신발은 도망치느라 그런 건지 돈이 없어 쫓겨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왼발에는 부츠, 오른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온 걸 보면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혹시 상처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건가 싶지만 부츠의 발목이 그리 길지 않은 앵글이라서 그렇게 보이진 않네요. 허리춤에도 단도와 주머니를 차고 있습니다. 뭉툭한 지팡이는 사나운 개를 쫓기 위한 호신용으로 보이고요. 바구니에는 수건으로 보이는 물건이 매달려 있네요. 버들고리의 둥근 고리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숟가락이 끼워져 있습니다. 일종의 자물쇠 역할을 하나 봅니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이런 분들에게 "Peddler"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습니다. 주로 물건을 팔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는 행상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대개 작은 상품을 가지고 다니며, 시장이나 거리에서 물건을 판매했습니다. 이 시기 행상인들은 다양한 상품을 팔기 위해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지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농촌 지역과 도시 간의 상품 유통을 담당했지요. 한국의 보부상이 생각이 나네요.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이러한 행상인들이 일상적인 경제 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홀쭉한 뺨과 목의 주름을 보면 중년 이후로 보입니다. 오른쪽의 죽은 나뭇가지에는 악의 상징인 올빼미가 앉아 있고요. 마당에는 새 두 마리가 땅을 헤치며 모이를 찾고 있나 봅니다. 목에 날카로운 장식을 두른 강아지는 몸을 웅크리고 공격적인 표정을 하고 행상인을 바라보네요.
The Wayfarer, 1500-1502/Artchive
이곳은 예상하신 대로 사창가입니다. 문 앞에서 남자가 오크통에서 와인을 따르러 가는 여자를 잡고 수작을 부리네요. 술은 필요 없으니 자신과 함께 있자고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여자는 집 밖에서 소변을 보는 남자를 기다리는 걸까요? 아니면 이 집을 지나쳐 가는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그는 지나치다가 쾌락에 유혹당한 듯 길 위에 멈춰 선 모습입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해 현재의 가난한 상태가 되었고, 또다시 유혹에 넘어갈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어찌 되었든 나그네의 영적인 상태는 덜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오른손에 모자를 잡고 있는 팔과 몸은 계속 앞으로 가는 방향이지만, 고개는 미련이 남았는지 사창가를 향하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나그네 마음을 시각화했습니다. 외양간에는 소가 음메 소리를 내며 울 듯하고 창틀에는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나그네의 마음과 달리 저 멀리 보이는 전원 풍경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지붕이 무너져 기둥이 드러난 지 오래되었는데 미처 손을 쓸 여력이 없었나 봅니다. 창문도 떨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유리창은 깨져있고요. 이층 창틀에 걸린 빨래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역시 플랑드르 화가 답습니다.
(그림 우). < The Duke and Duchess of Osuna and their Children>(1788). 이 작품은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 기론, 그의 아내 호세파 알론소 데 피멘텔, 그리고 그들의 네 자녀를 그린 가족 초상화입니다. 고야는 이들 가족을 개별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각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냈습니다. 회색과 녹색 톤을 사용하여 섬세하게 직물과 레이스 등의 질감을 표현했고요. 아이들 입은 옷차림이 다른 초상화들에 비해 편안해 보입니다. 고야(Goya)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림 분위기가 따뜻해 보입니다. 다른 귀족 초상화들에서 보이는 뻐기는 자세는 1도 없는 모습이고요. 우아하고 품위 있게 그들의 인품과 함께 온화한 가족 분위기를 담아냈습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드문 가족 초상화로, 플랑드르나 영국의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카를 4세와 그의 가족들 Charles IV of Spain and His Family, 1800-1801/ wikipedia
(1) Carlos Maria Isidro(1788-1855)- King's 2nd son
(2) Francisco Goya
(3) the future Fernando VII(1784-1833)-King's 1st son
(4) Maria Josefa(1744-1801)-King's sister
(5) Maria Antonia of Naples-by the time the work was created, she was yet to marry Fernando VII(but was expected to do so in the near future;that may explain the deliberate concealment of her face)
(6) Maria Isabel(1789-1848)-King's daughter
(7) Maria Luisa of Parma(1751-1819)-King's wife
(8) Francisco de Paula(1794-1865)-King's youngest son
(9) Charles IV(1748-1819)-King
(10) Don Antonio Pascual(1755-1817)-King's brother
(11) Carlota Joaquina(1775-1830)-King's eldest daughter
(12) Don Luis de Parma(1773-1803)-King's son-in-law
(13) their baby Carlos Luis(1799-1883), the future Duke of Parma
(14) his wife Maria Luisa(1782-1824)-King's daughter, holding number 13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프란시스코 고야가 1800년에 시작해 1801년에 완성한 대형 유화 작품입니다. 현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과 비교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왕 칼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묘사하고 있으며, 고야의 날카로운 풍자와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고야는 왕실 인물들의 외형적 특징과 내면적 성격을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왕비의 권위와 왕의 무능함을 강조했죠. 이 작품은 왕실의 허영과 탐욕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루이 16세의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촌 간이었던 카를 4세는 스페인에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고야(Goya)에게 친근한 왕실의 이미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보통 왕이 있어야 할 중앙 부분에 왕비가 있습니다. 카를 4세가 왕위에는 올랐지만 워낙 국정에 무관심하고 사냥에 열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자리를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왕비의 총애를 받아 감히 재상까지 오른 마누엘 고도이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스페인 왕실의 기운이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Diego Vela'zquez , Las Meninas, 1656/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TlvXGblFsv8&t=1s
1800년대는 스페인의 역사에 있어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18세기말부터 칼를로스 4세의 정치적 무관심으로 여러 혼란이 일어납니다. 반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에 즉위합니다. 18세기말부터 스페인의 내정을 간섭해 오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총통으로 즉위하자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친형 조셉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를 스페인의 국왕으로 임명해 버립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1808년부터 스페인 독립운동이 시작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 밖으로 추방당했던 카를로스 4세의 장남이 1814년 페르난도 7세로 스페인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운 마드리드 시민을 기리는 그림을 제작할 것을 고야(Goya)에게 주문했지요.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이튿날인 3일에 일어난 사건을 두 점의 그림으로 제작했습니다.
그림좌. 1808. 5. 2. 그림우. 1808. 5. 3/wikipedia 그림좌. The charge of the Mamelukes, 1814/wikipedia(1808년 5월 2일)
그림우. The Third of May, 1808/ 1814/wikipedia
당시 나폴레옹 군대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마멜루코 용병과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터번을 쓰고 둥글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는 등의 아랍식 복장과 프랑스식 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에는 수도를 수호할 만한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날의 시민 봉기부터 프랑스에 맞선 스페인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808, 5월 2일.
땅바닥에는 프랑스 군인과 마드리드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습니다. 앞줄의 마드리드 시민들은 말을 공격하고 마멜루코 용병을 칼로 찌르고 말에서 끌어내리려 합니다.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고 신고전주의자들은 역사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이 다른 역사화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역사화에는 늘 영웅이 등장하지요.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든지,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 말입니다. 그러나 고야의 이 그림에는 그런 비장한 인물이 없습니다. 가장 뒷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전혀 '영웅'으로 보이지 않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한 무리의 무지한 군중들처럼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일 겁니다. 붉은 바지를 입고 피를 흘리며 말에서 거꾸러져 있는 마멜루코 용병과 그를 찌르는 스페인 사람을 보세요. 용병은 피도 많이 흘렸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칼로 그를 찌르는 사람은 그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를 계속 찌르고 있습니다. 광기가 그림 전체에 휘몰아칩니다.
1808, 5월 3일 새벽.
봉기에 가담했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대에게 처형당했습니다. 마드리드 시 외곽과 시내 곳곳에서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합니다. 고야는 이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 1808년 5월 3일 El 3 de mayo en Madrid>에서 곧 죽음을 맞을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은 다양합니다. 기도하는 사람,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사람, 좌절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마주 보는 사람 등... 이 새벽에 무슨 날벼락입니까?
그러나 스페인 왕실의 빈틈을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거침없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뒤태만 보일 뿐 아무도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고야(Goya)는 총살이 자행되는 순간의 프랑스 군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일렬로 선 군인들과 마치 처형당하는 예수처럼 흰색의 옷으로 죄 없음을 상징하듯 두 팔을 벌린 마드리드 시민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새벽어둠 속 마드리드시의 실루엣이 강한 대비를 이루고요.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중기 작품입니다. 파노라마 식의 3폭 그림들이죠.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다채롭고 창의력이 풍부하며, 화려하면서도 엄청 복잡합니다. 환상이 폭발한 것처럼, 대혼란의 종말이나 악몽의 상황을 예언한 풍경과 인류 최초의 순결한 전원 풍경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의 중기의 작품들은 초기의 환상과 관념이 점차 다듬어지고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Haywain Triptych, 1516/wikipedia
세 폭 패널로 구성된 <건초 수레 Haywain Triptych>의 중앙 패널에는 인간의 타락한 도덕성을 풍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거대한 건초 수레는 오른쪽 패널의 지옥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옥에서는 인간들의 저지른 죄로 인해 벌을 받고 있고요. 왼쪽 패널에는 인간의 영벌에 관한 주제를 담은 총 네 개의 이야기를 묘사했습니다. 타락천사들의 추락, 이브의 탄생, 뱀의 유혹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 그려져 있습니다.
중앙 패널에는 커다란 건초더미를 가득 실은 마차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시끌벅적한 모습입니다. 네덜란드에는 "세상은 건초더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건초더미에서 각자 움켜잡을 수 있는 만큼 취한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습니다. 마차 뒤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교황과 황제를 비롯해 세속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뒤 따르고 있습니다. 마차 주위에는 서민들이 하나같이 한 움큼이라도 건초를 더 가지려고 욕심스럽게 다투고 있고요. 사다리를 놓고 건초더미에 오르려는 사람, 갈퀴로 건초를 빼돌리려는 사람, 바퀴에 걸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에 건초를 조금이라도 더 움켜잡으려고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 등 사람들이 치열하게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모두 커다란 건초더미를 보호하려는 마음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건초를 양껏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건초 수레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한없는 욕심을 상징합니다. 건초를 차지하려는 탐욕은 다른 죄를 낳기도 하고요. 화면 아래 오른쪽에는 뚱뚱한 수도사가 한 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자신이 모아 놓은 건초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그를 대신해 수녀들이 큰 자루에 건초를 채워 넣고 있고요. 마음의 수양을 쌓고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수도자의 서약은 저버리고 교회 재산을 빼돌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 왼쪽에는 여자 환자가 고통스럽게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아이가 치맛자락을 잡고 보채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인이 한 집시에게 손금을 보고 있고요. 이들 뒤로는 검정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아이를 업은 마술사이자 도둑이 보입니다. 모두 탐욕에 젖어 속임수와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더욱이 이들 위쪽에는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장면도 묘사돼 있습니다.
건초 꼭대기로 올라가 볼까요. 두 쌍의 남녀가 한때를 즐기고 있습니다. 소박한 차림의 한 쌍은 덤불 속에서 입을 맞추고 있고, 우아한 차림을 한 다른 한 쌍은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 오른쪽에는 공작새 꼬리를 한 파란색 악마가 있습니다. 이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탐욕에만 눈길이 가 있습니다. 부를 향한 인간의 온갖 범죄, 혼돈과 분열의 결말은 어떨까요? 수레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 수레는 결국 기이한 생물들에 의해 천천히 그들의 목적지인 오른쪽 패널, 곧 최후의 심판인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PSEdduXXc
15년 동안 궁정 소속 화가로 활동한 끝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게 되었고, 수석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왕과 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1780년대에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많은 귀족에게 주문을 받았고요. 그들 중 계몽주의 정치인이나 지식인들과도 친분을 맺게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적, 도덕적, 정치적 개념을 고야(Goya)와 공유했고, 이들을 통해 익힌 그의 사상은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1792년 겨울.
고야(Goya)는 세비야를 여행하던 중 이름 모를 중병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됩니다. 이후 고야는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귀머거리로 살게 됩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1800년대 들어서 로코코를 포기하게 됩니다. 대중적이거나 풍자적인 암시들을 단순화시켜 환상적으로 나타내는 사실주의를 드러냅니다. 1810년 경부터 우세하게 나타나는 검은색과 갈색의 굵은 터치를 비롯하여 '검은 그림'시리즈를 완성합니다.
검은색은 19세기 고야가 살았던 불안의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색인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통해 인간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귀족들의 두 얼굴도 보았고요. 그리고 종교재판이 여전히 스페인 시민들의 일상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고야 역시 종교재판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이기도 하고요.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계몽주의의 희망까지 뒤엉켜 고야의 무의식 속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만들어 냅니다. 중세의 꿈에서 서서히 시민들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삶과 죽음이 직접적으로 교감하면서 말입니다.
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명작을 남긴 베토벤처럼 혹은 모든 것을 잃고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명품 그림을 남긴 렘브란트처럼 고야는 4년에 걸쳐 팔 기 위한 그림이 아닌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예술가들에게 실존적인 불안은 아예 예술적 형상을 엄청나게 화려한 칼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고야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검은색 톤으로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나지요. 한편, 고야의 그로데스크 한 판화 작품은 18세기 이후 여러 미술 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고흐, 마네, 모네, 세잔 등과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말입니다.
그림좌. Saturn Devouring His Son, 1820-1823/wikipedia 그림우. red chali on laid paper
귀머거리의 집 Quinta del Sordo, 1900
난 항상 초조함 속에 살고 있어.
파고든 주제의 끝까지 가지 못하면 난 잠도 잘 수 없고
휴식도 취할 수 없어.
지금의 이 삶을, 난 '산다'라고 말할 수 없어.
-고야가 영원한 친구인 사파테르에게 쓴 편지 내용 중-
끔찍한 공포감을 주는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광기 어린 눈빛으로 이미 상반신을 먹어치운 '사투르누스', 여전히 희생자의 몸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에 오싹해집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고야가 자신의 집 벽에 직접 그린 14점의 '검은 그림'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로마신화의 사투르누스)가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자식 중 하나가 자신을 몰아낼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삼켰습니다. 저 커다란 눈을 마주하며 매일 식사를 했을 고야의 마음자리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신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저 괴물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꽉 쥐고 있는 저 손이 더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1819년 외곽에 '귀머거리의 집 '이란 뜻의 '킨타 델 소르도'로 이사를 합니다. 그는 1층과 2층에 있는 거실의 벽에 거대한 벽화들로 장식하였는데 모두가 악행, 공포, 불안, 죽음과 같이 무거운 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 모두에 일관적인 도상적 의미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작가의 광기를 띠고 있어 '검은 그림'으로 널리 알려집니다.
이 검은 그림들은 고야 사후에 이 집을 구매한 프랑스 남작에 의해 벽화를 캔버스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1881년 스페인 정부에 모든 그림들이 기증되면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됩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고야의 그림이 특히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Lawz8TcPig
<Self -Portrait with Dr. Arrieta> (1820), Francisco Goya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소장 작품으로 1820년 그려진 유화 작품입니다. 고야가 병상에서 자신을 돌봐준 의사 아리에타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4q2S8-U-bk
The Garden of Earthy Delights, 1500/wikipedia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쾌락의 정원>은 1490년에서 1510년 사이에 그려진 삼면화 작품입니다.
왼쪽 패널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그린 장면입니다.
중앙 패널은 수많은 나체 인물들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세속적 쾌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패널은 지옥을 묘사하며, 죄인들이 받는 다양한 형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세밀한 묘사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종종 세속적 쾌락의 덧없음과 죄의 결과에 대한 도덕적 경고로 해석됩니다.
보쉬(Bosh)의 이 작품은 수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도 풀지 못한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유튜브 영상과 함께 자세히 보시길 권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BG621XEegk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특권이 있지요. 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것, 아니면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 그렇지만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것. 바로 그 지점을 과감히 건드리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죠. <기생충>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요.
히에로니무스 보스( 1450-1516)가 살았던 북방 르네상스 시기, 그의 시대적 배경은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로, 네덜란드는 여전히 중세적인 성격이 강했던 사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쉬(Bosch)는 창의적인 표현을 통해 근대를 예고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지금 보아도 낯설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출세 지향적이었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갑작스러운 청력의 상실, 나폴레옹 전쟁과 스페인 독립 전쟁의 영향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악행, 불안, 공포, 죽음을 세상 밖으로 그만의 방식으로 끌어내기도 하고요.
지금도 어딘가에 묵묵히 경계를 넘는 사람들이 계실 겁니다. 응원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실 수도 있습니다.
제목 그림
Francisco Goya, Manuel Osorio Manrique de Zuniga, 1784-1792, The Metropoiitan Museum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