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었다는 것, 비워낸다는 것

특별함을 주는, 평범한 문장들

by 보나쓰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P.70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텅 빈 눈, 텅 빈 가슴, 텅 빈 머리.

글을 쓰다 보면, 내 안에 비어 있는 곳들이 유난히 많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내 몸은 근육, 뼈, 혈관, 혈액 등으로 가득 차 있고, 매 순간 수많은 세포 변화와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아주 복잡한 공간인데도, 나는 자주 내가 텅 비어 있다고 느낀다. 어쩌면 글과 그림을 통해 비워내는 과정을 반복해 온 좋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가끔은 인생에서 뭔가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래전, 고통이 극에 달해 더는 이겨낼 수 없다고, 이번엔 정말로 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내 몸의 모든 것을 게워냈다고 믿었다. 실제로 위액이 나오도록 토해냈지만, 위 내벽에는 여전히 세포가 살아 있고, 내 생이 끝나기 전에는 완전히 비워질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그때 이후로 내 머릿속에서 혼란을 비워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혼란뿐 아니라, 온갖 좋은 것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감정조차도 비워낼 수 있는 일종의 초월적 능력이 생긴 것 같다. 게다가 나는 그 능력이 생기는 순간을 안다.


가사가 없는 연주곡, 특히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틀어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이나 감각을 언어로 끌어낼 때다. 또 다른 때는, 미술관에서 그림 앞을 어슬렁거리며 제멋대로 감상에 빠지는 순간들이다. 사실 나는 그림을 볼 때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생각이란,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만났던 그 순간을 떠올릴 때 비로소 태어난다. 느낌이 생각으로 전환되고, 그것이 바깥세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전율이 느껴지는 그림을 만났던 순간, 해소된 감정이 나를 또 다른 감정과 감각으로 이끄는 느낌이랄까.


요즘 내 가슴속은 텅 비어 있는 듯하다.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고, 절실하지도 않다. 글을 쓰고, 일러스트를 그리고, 운동을 하는 일들은 흥미로워서가 아니라, 그저 할 수밖에 없어서 한다. 점점 비어 가는 나 자신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 속에 있던 무수한 쓸데없는 감정들이 녹아내려, 더는 나를 뒤흔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작은 기적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에도 심근세포는 박동을 일으킨다.
심장이 ‘살자고’ 뛰고 있다.
나는 무너질 것 같은 순간, 그 사실을 떠올린다.
그래서 글을 쓰고, 일러스트를 그리고, 미술관으로 쫓아간다.
토사물을 쏟아내듯, 더 텅 비워내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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