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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라! 아직은 내 용서가 여기까지인 것 같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어요

by 보나쓰

부모님과 스스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사라져 생사도 몰랐던 언니가 ‘폐암’에 걸려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가 어찌어찌해서 언니의 소식을 간간이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언니를 못 보고 산 지 너무 오래되어서, 미움도 모르겠고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그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목이 칼칼해지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마음의 충격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와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스무 명의 환자가 대기 중이었다. 병원 대기실의 공기는 희미하게 소독약 냄새가 섞여 있었고,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친 몸을 누이고 싶다고 생각할 때쯤에 진료실에서 의사가 목을 살피고, 처방전을 써주었다. 엉덩이에 주사를 맞는 순간, 차가운 바늘 끝이 살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에 잠시 숨을 멈췄다. 약국에서 "이 약들을 먹으면 좀 잘 수도 있나요?" 물었다. "졸린 약이 들어있긴 해요. 도움이 될 거예요."


아침, 점심에 약을 챙겨 먹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이틀째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해열제 덕분에 이마에 맺혔던 미열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아이패드를 열었다. 화면에는 며칠 전 그리다 만 그림이 떠 있었다. 펜을 잡고 패드 위를 쓱싹쓱싹 그을 때마다, 손끝에 전해지는 진동과 미세한 소리가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집중해서 선을 긋다 보니, 어느새 일러스트 몇 개가 완성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에 불타오르던 햇살은 이제 벽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유리창 너머로 은은하게 퍼지는 빛이 조사로 만든 한복 치맛자락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패드를 덮고, 잠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른 만큼, 모르는 대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건강만 해라. 엄마를 인정하지 않는 딸이어서가 아니라, 그 마음을 갖게 한 일들에 대한 이해와 안타까움이 있어서 그 마음만은 — 건강만 해라 — 그 마음만은 갖고 살았다. 오래오래 살다 보면 달라지는 것도 있겠지. 그러다 보면, 무심하게 얼굴 보는 날도 있겠지. 용서란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날이 있겠지.


엄마의 아픈 손가락, 나의 치부. 언니는 내게 그랬다.


그림을 그리고, [체리토마트파이]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의 촉감이 손끝에 닿는데 아렸다.


아직 볼 것도 있고 할 일도 있지만
난 이제 떠나니 보내주세요.
나의 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거든요
눈물로 나를 붙잡지 말고
우리가 함께한 세월을 기뻐해주세요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대들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과연 짐작이나 할까요.
그대들이 보여준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길로 가야 할 때가 되었네요.
그대들이 꼭 울어야겠거든, 잠시만 울어주세요
그러고 나서는 슬픔 대신 기쁨을 품어주세요.


그리고 나는 이 답답함을, 현기증 나는 현실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저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도와드리는 것만으로 도리를 하자고 정리했다. 가슴속의 걱정과 감정을 다 챙기면서 살 수는 없다.


살아라! 언니 너 사라지고 끊임없이 했던 엄마의 기도가 너를 살릴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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