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 지갑!
갑자기 생각이 났다. 소설 [체리토마토파이]를 읽고 있었는데, 주인공인 아흔 살 잔이 자신이 치매인지 확인하는 장면에서였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 이를테면 갑자기 외국에 나가야 한다거나(생각하기도 싫지만) 혹시 불이라도 나서 급히 집을 벗어나야 할 때를 대비해, 지퍼가 달린 커다란 지갑에 신분증, 도장, 얼마간의 현금과 비상용 신용카드, 여권 등을 넣어 두었다. 언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어느 뉴스를 보고 나서였던 것 같다.
4월에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지갑에서 여권만 꺼낸 뒤 서랍에 넣다가 문득 지갑을 숨겨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 혹시 도둑이라도 든다면, 그 지갑만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참 뜬금없는 걱정이었다. 예전에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비상용 지갑까지 준비해 뒀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꽤 둔감해진 편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여행 전에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지갑을 숨길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평소에도 내 손이 잘 닿지 않는 곳, 물건들 틈에 끼워두며 속으로 ‘참 기가 막힌 곳이다, 내가 잊으면 나도 못 찾겠지’ 하며 만족해했다.
열흘간의 코타 키나발루 여행은 즐거웠다. 오랜만에 뜨거운 태양 아래 물속에서 하루 종일 살을 태우며 보내는 시간, 틈틈이 파라솔 아래에서 독서를 즐기는 여유가 너무 좋았다. 쇼핑도 나가지 않고 리조트 안에서만 하루 종일 보냈는데, 시간은 정말 빨리 흘러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붉게 탄 피부를 보며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지에서 돌아오자마자 트렁크를 비우지 않으면 몇 날 며칠이 갈지 몰라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풀고 세탁소에 맡길 빨래와 손빨래가 필요한 세탁물을 나눠 담았다. 다른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에 두었다. 그날 밤,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7월이 된 지금까지, 나는 여행 전에 숨겨 두었던 지갑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 속 노인을 애처로워하며 ‘나도 늙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정작 안타까운 사람은 내가 아니었나. 지갑을 숨겨뒀던 곳으로 가보니, 다행히 아니 당연히 지갑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책을 다시 펴고, 잔 할머니가 답하던 치매 질문지에 나도 답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왜 안 그러겠는가. 조기 치매도 있다는데.
노인이 되어가면서 사람에 대한 겁도 많아지는 것 같다는 잔 할머니의 말이 떠오르면서, 나는 타인보다 내가 더 겁난다. 이제 여행을 떠난다 한들, 지갑을 숨기는 일은 없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