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의 말
50대 후반 남자손님이 고급 볼펜을 찾으셨다. 당시 근무한 지 5개월 지났던 아따씨가 고급 볼펜칸을 안내하게 되었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말에도 친절하게 응대하는 아따씨에게 손님이 물었다.
"이 볼펜은 독일제입니까?"
손에 들린 볼펜을 보며 당황해하는 아따씨가 머뭇거리자.
"매장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직원이 그것도 모르면 어떡하나. 공부 좀 해야겠어."
"아. 네. 제가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내가 나서서 프랑스제라고 알려주어도 손님은 아따씨에게만 이야기했다. 그리고 들리는 말이.
"이거 할인해서 이 가격인 거죠? 돈이 모자라네. 어떡하지. 어떻게 몸으로 좀 때우면 안 될까. 남자라서 남는 게 힘 밖에 없는데." 하며 아따씨에게 이상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아따씨와 그걸 즐기는 듯한 남자손님 사이에서 내 속은 부글거렸고 위험인물이라 판단하여 예의 주시하게 됐다. 이상한 문장을 뱉을 때마다 대화를 차단해 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손님이 선택한 볼펜을 가지고 카운터로 오셨다. 계산하는 동안에도 아따씨를 향한 말의 수위가 낮아지질 않으니 가시 같은 불쾌함은 계속되었다. 계산을 끝내고도 나가지 않고 매장업무와 관련 없는 세금 관련 사항까지 물어보시니 나와 사장님은 동시에 외칠 수밖에 없었다.
"손님! 그건 모릅니다."
"손님! 그건 여기서 물어보시면 안 되지요. 세무서에 가셔서 직접 물어보세요."
매장에 굵직한 남자목소리가 들리며 단호한 말로 끼어들자 그제야 손님은 매장을 빠져나갔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에서 아따씨를 살폈다. 손님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시원한 욕을 뱉어내는 그대의 눈동자가 얼굴과 함께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상황이 현재 진행형이면 현명한 대처가 어렵다. 더구나 판매를 하는 서비스직이 아닌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응대해야 하는 서비스직이기에 쉽게 분노를 표현할 수 없다.
자신의 친절함이 만만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은 손님을 응대하는 온도를 달리하게 만든다. 옆에서 바라보는 나에게도 그런 충격적인 발언과 추근거림은 영향을 준다. 다음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응대방식도 달라져야 하니까 말이다.
손님이 나가고 우리의 입은 욕두문자로 가득했다. 어린 강아지가 나오고 숫자 18을 외쳐가며 분노를 풀었다.
"아따씨야. 추근거리거나 너무 심하게 들이대는 손님은 그냥 두세요. 사장님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손님에게는 물건을 판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그래요. 기분은 나빠도 하나라도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줬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요. 그래 봐야 아따씨만 힘들잖아요. 남자는 힘이라니. 몸으로 때운다니. 그거 성희롱성 발언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직원에게 친절을 바라면 안 되지요. 단호히 거절하세요."
"저한테는 그게 어려워요. 끊어내기가. 아이 신경질 나. 아주 불쾌해요."
"나는 물건판매보다 아따씨의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다음에는 확 끊어버리세요. 옆에서 보는 나도 불쾌했어요."
손님에게 당한 당사자보다 더 분개한 내 말에 아따씨는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을 훔쳤다.
이런 일은 예전 여직원에게도 있었다. 물건을 계산하던 남자손님은 자신의 중요부위를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눈빛으로 여직원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고 한다. 당황스러움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대치상태로 있다가 내가 오자 눈물을 터트렸다. CCTV로 그놈의 만행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더러운 꼴을 보고 있느니 마음을 추스르는 편이 낫겠다 싶어 참았는데 신경질이 났다. 옆에서 함께 하며 지켜주지 못한 것에 미안해하며 남자손님이 매장으로 들어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경계하게 됐다.
어느 날 남자손님이 1년 전 구매한 볼펜을 잃어버리셨다고 매장을 찾으셨다. 비슷한 볼펜을 찾으시는데 순간 얼굴에서 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볼펜을 안내하고 손님의 커다란 코와 카드를 꺼내는데 순간 지났던 일이 생각났다. 일 년 전 성회롱 발언의 그 손님이었다. 혼자 카운터에 있던 나는 그 손님으로 판단되자 경계심이 들며 눈빛에 독기가 서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하자는 생각과 과한 눈빛을 조절하려 쌍꺼풀라인을 가린 채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며 그 손님을 응대했다.
'이상한 걸 물어보거나 엉뚱한 소리라도 하는 날에는 내 가만두지 않으리라.'라는 눈으로 담백하게 응대하는데 여전히 같은 볼펜을 찾으셨다. 손님의 질문에 적당한 거리와 필요한 말만을 던진 채 카운터 앞에서 손님의 계산을 기다렸다.
그때 2층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온 아따씨가 카운터 앞에 섰다. 일 년 전 성희롱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데 손님이 볼펜을 가지고 오셨다. 계산해 주려는 아따씨를 밀치고 여러 가지 요구하는 손님의 주문을 마무리해 냈다.
"주문하신 여분의 볼펜은 금요일에 도착합니다. 물건이 오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전화 주세요."
"과장님! 저 손님."
"기억나죠. 그때 성회롱 손님"
"네. 모르고 있다가 코를 보는데 갑자기 확 생각났어요."
"내가 알려주려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말을 못 했어요."
"와~ 그걸 미리 알고 있었어요?"
"그러게요.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 코와 볼펜, 카드를 보는데 예전 일이 떠오르면서 확신했었어요. 그때 그 손님 맞죠?"
"네. 맞아요."
"그래서 악귀눈을 장착하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지요. 쓸데없는 소리 하면 박아버리려고 벼르면서."
"헉. 과장님 눈이 악귀눈이긴 했어요."
우리는 기억했다. 몸이 알아서 기억하고 생각에서 꺼내주니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됐다. 일 년 뒤에 그 손님이 방문한 것도 웃긴 일이지만 자영업이란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한 곳에서 영업을 하며 이런 손님 저런 손님을 만나다 기억하기 싫은 사람까지 머리에 심어지니 뽑아내는 것도 능력인가 싶다.
상대를 알고 그 손님을 응대한 오늘. 나는 소심한 복수를 한 것 같다. 악귀눈을 장착하고 응대하며 불현듯 날아올 수 있는 변수들을 예상하고 응대했으니 말이다. 더 통쾌한 복수는 손님의 면상에다 욕을 날려주는 것이겠지만 직원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저 마음속으로 욕을 할 수밖에. 부디 밖에서 마주치지 말고 다른 매장에서는 조용히 물건만 구매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자영업
모르는 이를 맞이하는 일
무언가 두렵다
생전 처음 보는 이들과
어색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웃어야 하고
나는 오롯이 받아내야 한다
가족 간에도 어려운 일을
가족처럼 해내라 한다
이제 바뀐 생각들
오는 말들에 따라
가는 말이 다르니
사람마다 온도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