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인 듯 혼자 아닌 함께
새벽 여섯 시
이른 체크 아웃을 했다.
지루한 시간일 거라고
심심할 거라고 생각했던 10일의 혼행일정이 눈 깜빡할 사이에 후다닥 가버렸다.
8시 40분에 제주를 출발하여 완도까지 가는 여객선을 타려면 일찍 나가야 한다.
그동안 바다가 잘 보이도록 창문 쪽으로 약간 비틀어 놓았던 침대도
함께 했던 침구류도 꼼꼼히 바로 잡았다.
창문 앞으로 옮겨 두었던 테이블도,
줄줄이 옷을 걸어 두었던 옷걸이도,
그리고 나란히 두었던 화장품도 모두 하나하나 정리했다.
함께했던 공간을 둘러본다.
푸른 벽면, 하늘거리는 아이보리 커튼, 푹신한 하얀 침구, 단순하고 투박한 머그잔...
이 낯선 곳이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생각하게 해 줬다.
또 만나자 우리
7시부터 여객선의 입차가 가능하다고 띠리링 문자가 왔다.
배의 빠른 입차는 곧 빠른 출차를 의미한다.
자연도 그리고 세상도 다 원칙과 규칙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상점에서 물건을 살 라치면 단 10원도 깎을 줄 모르는 나 같은 종류의 사람은
그냥 물건에 원칙적인 손톱만 한 가격표 붙여져 있는 에누리없는 상점이 제일 편하듯 말이다.
일찍 차를 넣으면 도착지에서 일찍 출차하도록 하는 시스템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좋다.
작년 5월부터 새벽 4시 10분에 울리는 알람소리에 벌떡벌떡 일어나 안 떠지는 눈을 비벼가며 절반은 뜨고 절반은 감고 교회로 향했다.
50살이 훨씬 넘은 늦은 나이에 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데 많은 유익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버렸다.
다른 이들은 전날의 고군분투로 잠에 빠져있을 시간에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참 은밀하고 고즈넉하며 여유 있다.
하루 일정을 미리 점검하다 보면 만의 하나 있을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집앞 쓰레기를 천천히 치울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복잡한 곳에서의 주차가 가능해 진다거나 , 좋은 일을 선점하는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된다.
나만의 생각에 빠져 제주항에 도착하니
이런! 시간 사용의 고수들!
이미 앞에 수십대의 차가 하나 가득이다.
차를 배에 선착하고 대합실로 갔다.
걱정했던 것보다 꽤나 쾌적하다.
제주 올 때는 3등실을 이용했는데 갈 때는 2등 의자실을 예약했다.
가격이 조금 들더라도 2등 의자실을 강추한다.
그냥 직관적인 생각이지만 비싸면 그만큼 좋다.
의자에서 창문 너머 바다를 바라 볼 수 있는 것도 좋고, 바다와 하늘 그리고 배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며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멍을 하는 것도 재밌다.
출항 전 흥미로운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예인선
큰 배에 비해 볼품없이 작은 하얀빛 배 한 척이
여객선에 밧줄을 꽁꽁 묶더니 굉음소리를 내며 영차! 영차! 줄다리기를 하듯 용을 쓴다.
이윽고 여객선의 방향을 살짝 틀어 배가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움직임을 돕는다.
작지만 지독하게 강하다는 느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와우 정말 대단한 배다!!!
갑자기
그 짧은 장면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클로즈업되었다.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가듯 얼마나 많은 예인선들이 우릴 도왔을까?
인생 여행을 잘할 수 있도록
밧줄로 조용히 또는 조심히 안내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구나
예인선 같은 친구,
예인선 같은 선생님,
예인선 같은 인생 선배,
예인선과 같은 가족
나의 나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니었음을...
당겨주고 밀어주고 때론 과감히 끈을 풀어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내주는
예인선과 같은 손길을 바라본다.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지지만
우리도 때론 누군가에게 그런 예인선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가끔 누군가에게 그런 예인선이 되기도 한다.
아픈 날이 많았던 인생이고,
찰나 같은 기쁜 날이 있는 삶이었지만
예인선같은 하루를 살아간 생의 끄트머리에서 그래도 '인생 잘 살았다' 하는 생각이 잠시 머물면 참 좋겠다.
퇴사는 글렀고 제주는 갔다 연재 끄읏!!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 예인선: 강력한 기관을 가지고 다른 배를 끌고 가는 배.(출처: 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