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아무 생각 없어요
비가 온다.
오늘은 해안도로 드라이브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른 아침, 머릴 감는 동안 남편이 전활 했나 보다. 몇 번 연거 푸했는데 안 받았다는 이유로
본인의 전화를 왜 무시하냐며 씩씩거린다.
왜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화를 낼까?
아마도
전활 안 받으니 걱정됐다.
며칠 안 보니 보고 싶다
제주는 어떠냐
맛있는 거 많이 먹었냐
잠자리는 어떠냐 등등
잘 지내다가 집에서 보자는 얘길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그도 대화 스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50대 남자에 불과하다.
우린 스스로의 감정을 나 메시지로 말하는데 너무 무지하다
나도 그리고 그도
새벽에 일어나 뒤척거리다 다시 잠들다를 몇 번 반복하며 오전 내내 실컷 거드름을 피웠다.
오후 2시가 넘으니 배가 고팠다.
다행히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해가 나서 숙소 주변 산책이 가능했다.
성산일출봉 아래를 쉬엄쉬엄 돌아 산책하고 해오름식당에 가서 점심 정식을 먹기로 했다.
제주 올 때마다 들리던 곳이다.
성산일출봉 맨 끝에서 첫 번째 골목을 돌아서며
문득 혹시 그 식당이 없어졌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적당히 후미진
지극히 가족적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혼밥 먹기 민망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 있는 곳
그런 집밥 집
혼자라고 하고 두 개의 메뉴를 시켰다. 식당 할아버지가 제차 묻는다.
점심 정식이랑 해물라면이요??
제대로 먹는 첫끼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제 시장 청과물 사장님이 주신 맛보기용 귤 두 개와 쌉싸름한 커피 한잔으로 지금까지 버텼더니 손이 발발 떨렸다.
저 많이 먹을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사실 신선한 회를 듬뿍 떠서 생 겨자 적절히 올려놓고 간장 찍어 입에 와구와구 넣어 씹어보고 싶은 날이다.
시원한 사이다도 한잔 있으면 좋겠지
혼행을 하며 여러 식당을 가보지만 아직도 혼밥러들에게 진입장벽이 높은 곳이 있다.
바로 고깃집과 횟집이다.
웬만한 식당은 적절한 양을 주문하고 먹으면 그리 불편할 것 없건만
횟집과 고깃집은 조금 사정이 다르다.
횟집은 최소 2~3인분을 시키게 되니 참 부담스럽다.
도시에서 처럼 회전초밥집이라도 있으면 어찌어찌 명함이라도 내밀어 보겠지만
내가 머무는 곳 근처 횟집은 거하게 상다리 휘어지게 한상차림이다.
그렇게 혼행의 불편함이 하나 둘 발견된다.
사실 근처횟집에서 점심 정식을 먹을까 하고 망설였다.
맛집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다.
혼자 그 큰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않아 먹을 자신감이 아직 내겐 없다.
혹시 포장도 되냐고 전화로 물어보니 점심정식은 안된다는 답변을 들어 실망이 컸다.
포기...
괜히 속상하다.
먹고 싶긴 한대 양이 너무 많고, 남기자니 식당 주인께 죄송하고 아깝기도 하다.
포장해 가자니 숙소가 호텔이라 저장해 둘 냉장고도 마땅치 않다.
그렇게 소화할 수 있는 가능한 음식만 찾아다니다 보니 음식 선택에 약간의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이 혼행의 약점이다.
얼마 전 부모교육 감정코칭 강의 중 꽤 적극적으로 앉아서 듣던 주양육자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교육을 오기 전 어떤 감정들을 느꼈나요?
네?
.........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오른쪽 손바닥을 입에 갖다 대며 우물쭈물하더니 눈을 두어 번 굴린 후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는 대답을 했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 지어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지금
오늘의 감정은
지금의 느낌은 어떤지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감정에 솔직한 이름 지어주는 하루를 보낼 수 있길
그런 것이 익숙해 지길
내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되면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경청력과 공감력도 더불어 생기지 않을까?
오늘
비가 오고 배고파서 우울하고 적막하고 쓸쓸했으며
해가 나고 배불러서 상쾌했으며 행복했고
두어 번 심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