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번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한 ㅇㅇㅇ라고 합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 했던 고등학교가 아니어서 더욱 그랬겠죠... 저희 아버지는 자식 다섯을 고등학교까지 모두 졸업시키는 것이 최대 목표셨던 빈농의 대가족 집안 가장이셨습니다. 꿈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좌절을 일찌감치 맛보았습니다. 오빠 둘은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맏딸인 언니와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전문대학과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요... 저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2년제 도서관과에 입학하여 졸업했지요. 지금은 문헌정보학과로 바뀌었더라고요... 졸업 후엔 또 남들처럼 직장 생활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면서 살았지요.
언제부터 방송통신대학교 편입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도 동승동 대학로의 방송통신대학 본관 건물을 지나가다가일 수도 있겠고 가끔 만학의 꿈을 펼치는 방송대 나이 지긋한 학생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평생교육의 우리나라 4년제 국립 원격대학이라는 대학 홍보 영상을 보면서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은 공허가 자리 잡고 있었나 봐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고 즐겁고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가 아니라 하필이면 공부를 품고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의 삶이 형성되기도 전에 물질의 풍요보다 정신의 풍요를... 소유의 삶보다 존재의 삶을...이라는... 잡다한 독서에서 접한 이런 글귀에 막연히 이끌렸던 것이 이유가 될지... 돌잡이가 자기 앞에 놓인 것들 중 하나를 본능적으로 집어들 듯이요... 책 속의 많은 길들 중 하필이면... 아마도 여기 계신 학우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하...
특히 뭔가 시작해야 될 것 같은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생각났지요... 과는 국어국문학과... 이 결정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답니다. 망설이고 주저하고 포기하고 또 망설이고 주저하고 포기하고... 그러는 동안 세월이 마구마구 흘러갔지요...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도 히끗해지고 임플란트를 박고 고혈압 고지혈 진단을 받아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그런데 막 예순이 된 올해는 어인 일인지 잊고 있었네요... 작년에도 잊고 지나왔던 것 같아요... 직장에 다니고 애 키우고 살림을 기반을 다지느라 동분서주하던 날에는 새해마다 잊지 않고 떠오르던 방송대가 퇴직하고 한껏 여유로운 때엔 정작 떠오르지 않았으니... 참 아이러니 하지요?
아마도 예순이라는 나이가 주는 체념의 기운 때문이겠지요. 이젠 그 어떤 것도 늦었어... 이제 조용히 늙어갈 일만 남은 거야... 곱게 순하게 건강하게 고요하게 늙어갈 일만 생각하자고... 책이나 읽고 운동하고 가끔 여행도 다니고 가끔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으로 마음에 휘둘리기도 하겠지만 또 그렇게 포기하면서... 그렇게 살면 되겠지... 그랬는데요...
1월 말이나 2월이 막 시작되었을 즈음이었을 거예요... 남편과 어디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고요... 운전하던 남편이 뜬금없이 방통대 다녀보지 그래? 하는 거예요. 남편의 어투는 칼국수나 먹고 들어갈까? 하는 말처럼 너무나 심상했지요...
첨엔 제 귀를 의심했죠. 그다음엔 좀 놀랐고요... 남편은 내가 방송대를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사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한 번도 내 입으로 말을 한 것도 아니고요... 혹시 지나가는 말로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얘기를 귀담아 들어둘 만큼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은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하하...
놀란 다음엔 그랬지요,.. 됐어... 내 나이가 몇인데... 소설책도 방금 넘긴 앞장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리고 모집기간도 끝났을 거야...
그런데 그날 밤 머릿속에서 방통대가 떠나질 않는 거예요. 자려고 누웠다가 핸드폰을 열고 확인해 봤지요.
당연히 모집 기간이 끝난 걸 거라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그래야만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때가 추가모집 기간이더라고요... 추가모집 기간... 하필... 단연코 혹시 추가모집 기간 일지도 몰라... 하는 기대가 손톱만큼도 없었어요...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놀랐지요...
뭐야 이거... 하늘의 뜻인가??
하하...
저는 그런 경향이 있거든요... 뭔가 나의 의지나 노력에 의하지 않은 일들.,. 좋은 일이든 나쁜 길이 든요... 우연한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일상이 흔들리는... 그런 건 다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요... 무슨 그분 만의 뜻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해 버려요,.. 종교는 없지만요... 특히 나쁜 일은요... 그러면 그 어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받아들이기까지는 아픔의 시간을 지나야 하지만...
그래서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 서서 제 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최고 고령일 줄 알았는데 제 앞에 앉은 학우분 67세 그 옆에는 70세... 그 옆에도... 늦었다고 포기했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제가 뜬금없는 남편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으니 여러 학우분들과의 만남 또한 하늘의 뜻 아니겠어요? 하하...
학우 여러분과 잘 지내고 공부도 열심히 해 보고 싶답니다. 저는 사실 한 번도 열심히 살지 않은 것 같아요. 학교생활도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요... 그리고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한 두 개 모임에서도 심지어 복지센터 요가교실에서도요... 어디에서도 물에 기름처럼 겉돌았던 것 같아요... 마음이 늘... 꼭 엉뚱한 곳에 있는 것 같았어요... 내 있을 곳이 아닌... 그래서 늘 마음이 부대꼈어요... 그래서 늘 힘들었고요... 몸은 편했지만요...
여기선 마음이 그렇게 부대끼지 않아요 아직까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스터디 활동도 시작했고요.. 이젠 의욕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겠지만요... 여기 일흔 살의 스터디 같이 하시는 학우님이 그러셨어요... 돌아보니 예순 때가 가장 좋았다고... 돌아가라면 예순 살로 돌아가고 싶다고요... 저의 이 의기소침해지고 체념하기 쉬운 너무 많은 것 같은 나이가 누군가는 돌아오고 싶은 나이라는 거죠....
나이 예순에 이렇게 살게 한 하늘의 뜻은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지만요... 뜻이 없으면 또 어때요... 예순에 만난 새로운 세상... 더구나 제가 오랫동안 간직하고만 있었던 세상...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찹니다. 한 학기 보내고 힘들어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만요.
그렇다고 손 놓고 맥없이 하늘의 뜻만 기다린다는 건 아니에요... 진인사대천명... 전 이 말을 좋아해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애써 다 한 후 그 결과는 하늘의 뜻이라는...
아 저희 남편 방송대 편입했다고 하니까 놀라던데요... 진짜로 다니게? 묻기까지...
왜 갑자기 방송대 얘기를 나하테 했냐고 하니까 그때 그 시간에 갑자기 정년퇴직 후 방송대 법학과 3학년에 편입한 친구 놈이 생각났었다는 거예요... 그때... 바로 그때... 하필요... 그러니 제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게 그리 억지 같지는 않죠? 좀 확대해석한 것 같기는 하지만...
하하...
자기소개가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달콤한 술과 먹음직스럽게 지글거리는 고기를 앞에 두고 말이죠...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만나서 무척 반갑고... 신납니다...
꾸뻑...
<이 글은 과제물 길라잡이 강의 후 국어국문학과 신/편입생 환영 행사에서 자기소개 시간에 소개한 내용을 옮겨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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