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가는 길에
아침에 눈을 뜨니
틀니를 끼운 엄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틀니를 아침에 끼우고 저녁에 뺀다. 밤사이 착한 요정이 다녀간 듯 엄마 얼굴이 십 년은 젊어 있었다. 내가 깨어났음을 확인하자마자 엄마는 물었다. 강서방은? 강서방은 어쩌고 혼자 왔노? 혼자 보내 주드나? 엄마 내 나이가 몇인데 허락을 받고 내려와...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오는 거지... 염려 마... 닭곰탕 한 솥 끓여 놓고 왔으니까... 엄마가 비로소 미소를 잔뜩 머금고 누워 있는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엄마 나 많이 늙었지... 물었더니 세월에 장사 있나... 그래도 아직 한창이다 한창... 좋을 나이다... 하셨다.
실제 닭곰탕을 끓여 놓고 오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짓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엄마의 혹시나 하는 걱정을 날려버려야 했다. 벌써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된장찌개가 끓고 살이 많은 등 푸른 고등어가 구워지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날씨는 흐리고 습했다.
산책을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나서서 집의 왼쪽을 돌아 뒷골로 향했다. 좁은 길 양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울타리처럼 에워싼 첫째 오빠 소유의 밭과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오빠는 엄마와 지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다. 10분 정도 걸어가면 각종 농기구와 농약과 수확한 농산물을 저장해 놓는 저장고가 있고 비닐하우스가 있고 개 한 마리가 있고 닭 여러 마리가 있다. 나의 기척에 누워 있던 개가 몸을 일으키고 닭장 안에서 어슬렁거리던 닭들이 철망 주위로 머리를 까딱거리며 구구구구 모여들었다. 기척의 주인공이 먹이를 주러 오는 주인이 아님을 알고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하다가 컹 하고 짖는 개에게 안녕! 쉿! 나야 나...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더니 꼬리를 흔들며 더 이상 짖지 않았다. 귀가 바짝 서고 몸매가 날렵한 진돗개였다.
과수원의 끝 야트막한 산 너머에는
면내에서 5리 되는 ‘사그레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에는(1970년대) 면내의 우리 집 가까운 국민학교에 걸어서 다니는 사그레이 애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 이 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갔다.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그때는 산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고 밭보다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교과서와 빈 도시락이 든 보자기를 둘러맨 까까머리 꼬맹이들은 우리 집 앞을 지나갈 때면 괜히 우리 집 오빠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뛰다시피 빨리 지나갔고 나는 가끔 동네 애들을 불러 모아 뭐라도 되는 양 마루에 우뚝 서서 집 앞을 지나가는 사그레이 꼬맹이들에게 ‘사그레이 빵구 똥빵구’ 하면서 놀려댔었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 동창회에서 사그레이에 살던 동창을 만나 그때 얘기를 하면서 한바탕 웃기도 했었다. 그때는 사그레이로 넘어가는 산길이 가르마처럼 선명했었는데 지금은 산으로 한 발짝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야생의 산이 되어 버렸다. 쥐라기 시대 공룡들처럼 사라져 버렸다. 공룡들은 가끔 화석으로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산을 파헤치고 파헤쳐도 그때의 그 길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내 머릿속에만 있는 하얀 길이다.
그 산과 길은 또 어린 내가 꾸는 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산속에 총을 든 간첩들이 우리 집을 향해 포복해 오기도 하고(당시 '전우' 라는 인기 드라마 영향인 듯) 참꽃 속에 소복 입은 귀신이 숨어 있기도 했다. 간첩들이 온다고 집에 알려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 애를 태우고 귀신에 쫓겨 뛰어가다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나기도 하고 그 하얀 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바닥 없는 곳을 굴러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 날아오르기도 했다. 가난한 시대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거친 밥을 먹고 산으로 들로 냇가로 뛰어다니며 내 뼈와 살은 단단해지고 키가 자라났으리라.
내려가는 길에 올라가면서
얼핏 봐 둔 상추와 고추와 오이를 땄다. 따먹을 때가 된 알맞은 크기로 자란 것들만 골라 땄다. 아침 밥상에 올리고 싶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상추와 고추를 씻고 오이를 무치고 어제 풍기읍 마트에서 사 와 냉장고에 넣어 둔 소고기를 꺼내 볶았다. 햇감자도 볶고 싶었으나 엄마가 극구 말렸다. 둥그런 앉은뱅이 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밥을 푸려고 전기밥솥을 열었다. 하얀 쌀밥 위에 알맞은 크기로 썰어 넣은 감자와 고구마가 포슬포슬 익어 있었다. 쌀이 모자란 가난한 시절의 습관인가 싶었다. 감자와 고구마는 내솥의 바깥쪽으로 동그랗게 놓여 있었다. 가운데 봉긋하게 익은 하얀 쌀밥을 감자와 고구마가 에워싸고 있는 도넛 모양이었다.
엄마 왜 감자와 고구마를 이렇게 바깥쪽으로 붙여 넣었어?
밥과 함께 감자와 고구마가 이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담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대답이 건너오지 않았다. 돌아보니 엄마는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드시고 계셨다. 표정이 환했다. 아 엄마 귀가 좀 어두워졌지...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 고구마랑 감자를 왜 동그랗게 바깥쪽으로 붙여 넣었어? 엄마는 젓가락으로 오이를 집으며 말했다. 그래야 밥도 감자도 잘 익제...
감자와 고구마가 얹힌 쌀밥 한 공기를 엄마 앞에 놓아주며 또 말했다. 이제는 목소리가 저절로 크게 나왔다. 엄마 왜 쌀밥을 해 먹어? 잡곡 섞어 먹어야 몸에 좋지..
니 와서 쌀밥 했제... 내 혼자 먹을 땐 보리쌀 섞어...
엄마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으며 낮고 느리게 대답했다. 젓가락으로 집었던 고기가 엄마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상위에 떨어졌다. 엄마가 든 젓가락엔 고기 색이 밴 익은 양파 조각만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엄마 입 가까이 가져갔다. 엄마는 입을 벌려 고기를 받아 드셨다. 나는 또 재빨리 작은 접시를 꺼내 고기를 덜어 엄마 가까이 놓아주었다.
맛있다 맛있어...우째 이래 맛있게 했노... 옛날부터 니는 뭐든지 잘 했지러... 게을러서 안 해서 그렇지...
엄마는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엄마 밥 잘 먹네... 했더니 니하고 같이 먹으니까 글체... 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단둘이 마주 앉아 그나마 이렇게라도 내가 한 음식으로 상을 봐서 밥을 먹은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몇 날 몇 시에 도착할 거라고 미리 연락을 하면 엄마는 도착할 때까지 시장과 밭과 고방을 들락거리며 우리가 머무는 동안 먹을 음식을 장만했다. 두부를 하기도 하고 닭을 잡기도 하고 떡을 하기도 하고 돼지고기를 삶고 김치를 담갔다. 그래서 집에 내려오면 늘 엄마가 해놓은 푸짐한 음식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먹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되겠다고, 이젠 엄마집에 내려와서도 내가 엄마에게 밥상을 차려 줄 때라고, 조금 아니 많이 늦었지만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뒤늦게 깨우쳤다 나는. 점심은 엄마가 감자수제비를 끓여 주었다. 내가 부엌 한 켠에 놓여 있는 햇감자가 맛있어 보인다고 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끓여 냈다. 이렇게 나는 또 엄마가 해 준 끼니를 받아먹었다.
오후 3시쯤 부석사에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부석사까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느릿느릿 걷는 내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엄마는 노인정에 간다고 했다. 동네 친구가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며 서둘렀다. 둘째 며느리가 떨어질 만하면 귀신같이 알고 보내준다는 고급 기초 화장품만 바를 뿐 눈썹도 그리지 않고 입술도 바르지 않았다. 잊어버렸나 싶어서 급히 립스틱을 가져다 발라 주려 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이젠 너무 늙어서 바르면 더 흉해 보인다고 했다. 보기 흉하다고 누가 그래? 물었더니 누가 그래서 그러나.,. 내 보기에 그러니까 글치... 하셨다. 엄마가 먼저 실버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실버카도 엄마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걸 사용하면 아주 상노인이 될까 봐 그러셨을 것이다. 한번 넘어져 다친 후에야 가끔 사용하게 되었다. 이젠 별 망설임 없이 실버카를 의지해 집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이... 나는... 애달팠다.
비가 올 듯하여 우산을
챙겼다. 올 때마다 한 번은 꼭 가기 때문에 엄마는 으레 그러려니 한다. 가족과 함께 가는 것도 괜찮지만 혼자 걸어서 가는 걸 좋아한다. 어쩌면 내가 가끔 혼자 부석에 오는 것은 엄마가 보고 싶다는 이유와 함께 혼자 부석사에 가고 싶은 이유도 있다.
소백산 자락 해발 약 700m 고지에
위치한 부석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부석사 삼층 석탑(보물 제249호) 등이 있다. 유명한 사찰답게 부석사 소재의 글도 많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에는 '부석사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란 유명한 글이 있고 신경숙 작가의 2001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부석사' 란 단편소설도 있다. 바야흐로 관광의 시대를 맞이하여 부석사는 점점 관광지로 유명해지고 있다. 나는 이 변화가 반갑지만은 않다.
마을을 가로질러 나가 논밭길을
걸었다. 요즘엔 농촌의 웬만한 논밭길도 거의 포장이 되어 있다. 여름을 맞이하여 모든 작물과 잡초들이 한창 커가고 익어가는 초록의 논밭 한복판에 커다란 콘크리트 구조물인 정수장이 있고 그 옆으로는 꽃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논과 밭과 과수원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던 옛 모습을 기억하는 내 눈에는 아직도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넓은 하천이 있었다. 지금은 하천이 아니라 시냇물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물길이 작아져 있다. 작아진 물줄기 양 옆 넓은 녹지대에는 잡풀들이 아무렇게나 뒤엉켜 무성했다. 아무도 찾지 않아 야생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힘차게 맑게 넓게 흐르던 하천이 힘없이 흐릿하고 가늘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내 엄마의 틀니를 뺀 얼굴처럼 말이다. 1970년대 이곳에 살던 아이들에게 이 하천은 여름 내내 놀이터였다. 지금 잡풀 우거져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물가에는 모양도 크기도 다양한 돌들이 많았다. 우리는 납작한 흰 돌들을 모아 방과 부엌을 만들어 놓고 물속에 들어가 첨벙거리며 놀다가 나와서 쉬었다. 풀을 뜯어 찧어 반찬을 만들고 모래로 밥을 하는 소꿉놀이도 했다.
앞집에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애가
살았었다. 물가에서 함께 곧잘 놀았는데 어느 날에 공이 한 개 등장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공을 잡고 물속에 들어가면 그 공을 빼앗으려고 그 남자애가 뒤따라 물속에 들어왔다. 물속에서 남자애는 내 뒤를 안고 두 손을 앞으로 돌려 내가 잡고 있는 공을 빼앗으려고 했고 나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남자에게 뒤에서 잡힌 채 버둥거렸다. 물속에서 숨이 찰 때까지 그렇게 엉켜 버둥거리다가 물 밖으로 나와 납작한 돌을 모아 평평하게 만든 곳에 누워 쉬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금방 우리를 또 물속에 들어가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물속에서 그 남자애와 뒤엉켜 있는 그 기분이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자꾸자꾸 공을 잡고 물속으로 들어갔고 그때마다 그 남자애가 따라 들어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내 가족이 아닌 이성과의 첫 신체 접촉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얇은 여름옷을 입은 상태였었다. 언제쯤이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나... 좀... 조숙했나? 그런 생각에 푸슬푸슬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다가
또 생각났다. 집에 짐을 실어 나르는
용도로 쓰일 커다란 자전거가 생겼다. 그 자전거를 타고 싶던 나는 어느 날 그 자전거를 끌고 학교 운동장에 갔다. 혼자 자전거와 씨름을 하다시피 낑낑거리고 있을 때 그 남자애가 나타났다. 뒤에서 잡아주겠노라고 했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왜소한 체격의 그 애는 땀을 바짝바짝 흘려가며 힘에 부쳐하면서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자전거를 잡아 주었다. 가끔 돌아보면 흰 치아를 드러내 웃어 보이며 숨을 몰아 쉬며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만할까? 하면 좀 더 해 봐... 하면서 또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애 덕분이다. 아버지의 폭력과 계모의 구박으로 가출과 징계를 반복하던 그 애는 중학교 2학년 때 가출하여 내가 고향을 떠나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부석사 가는 길의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는 이끼가 끼고 틈마다 풀들이 돋아나 자라고 있었다. 길 옆의 개울가도 거의 풀들이 점령해 있고 개울가를 완전히 점령한 풀들은 길 옆 펜스 사이사이로도 뻗어 나와 있었다. 넝쿨식물은 아예 펜스를 넘어 보도블록을 넘어 도로 가 가로수까지 타오르고 있었다. 뱀처럼 꿈틀거릴 것 같은 넝쿨은 금방이라도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식물의 무서운 생명력이다. 사람이 사라지면 금방 세상은 식물로 뒤덮일 것 같다. 누구누구네 사과 농장이라는 가건물과 천막으로 만들어진 노상가게의 평상과 의자는 방수천으로 덮여 있었다. 사과밭에는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행인도 없었다. 들일을 가는 농부가 명품을 걸친 듯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산뜻하게 잘 닦여진 아스팔트 도로에 자동차들만이 드문드문 질주했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지나가는 트럭 안에서 어? 쟤 ㅇㅇ 같은데... 할 것도 같았다. 한 시간 여를 걸어 소백산의 정기 어린 부석사 앞에 도착했다.
넓은 주차장엔 그래도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사람 없는 카페와 음식점들을 지나 매표소가 있는 입구에 도착했다. 매표소도 비어 있었다. 지난해 겨울엔 아침 일찍 왔었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한 스님이 승복 위에 등짐형 송풍기를 지고 길 위눈에 쌓인 눈을 길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눈 온 날 아침 잿빛 승복의 스님이 싸리비로 눈을 천천히 쓸어 내는 산사의 모습도 이젠 볼 수 없는 옛 그림자가 된 모양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생경한 지 한참 쳐다보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날 그 이른 아침 매표소에 사람이 있었다. 직원이기보다 가까운 마을에 사는 아저씨 같았다. 문화재 관람료가 천 원이라고 했다. 나는 어쩐지 돈을 내고 들어가는 게 꺼려졌다. 돈을 내고 들어가면 나는 완전한 관광객이 될 것 같았다. 나에게 여기 부석사는 관광지가 아니라 고향인데 말이다. 그런 마음에 매표소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저... 여기 부석사 밑 마을에 엄마와 오빠가 살고 있어요. 나는 여기서 20년을 살았고 지금 잠깐 다니러 왔는데... (관람료를 내야 하나요?)라는 직접적인 말은 혹시 돈 천 원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할 것 같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어서 돈을 내고 들어가던가 그냥 돌아가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결국 돈 천 원을 내고서야 부석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왠지 이제 고향을 잃어버린 듯 나는 잠깐 쓸쓸해졌다. 그렇게 나는 그날 눈 내린 부석사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 올라갔었다.
키 큰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무성한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빗물이 나뭇잎에 닿아 투닥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지만 하늘을 가려준 나뭇잎 때문에 소리에 비해 지상에 내려앉는 빗물은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미미했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올라가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드물게 내려오는 사람은 있었다. 여자 둘도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도 있었고 나이 지긋한 남자 셋도 있었다. 800m에 이르는 은행나무길을 걸어 일주문에 당도했고 일주문에서 천왕문 안양문(안양루)에 이르는 108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무량수전 앞에 도착했다. 숨이 차고 땀이 났다. 유명한 사찰답게 7월의 궂은 날씨에도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해설사와 관광객 한 무리가 무량수전 앞 석등 주변에 모여 있었다. 해설사는 열심히 설명하고 관광객들은 귀 기울여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사를 토해내기도 했다.
그들을 지나 무량수전으로 올라서
열려 있는 문으로 내부의 소조 아미타불 좌상(국보 제45호)을 알현했다. 아미타불이 너 또 왔냐? 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면 많은 반가움과 약간의 질책과 또 약간의 안쓰러움이 묻어있는 자상한 목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네... 또 왔어요... 이렇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서 아미타불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무량수전 옆에 있는 부석(浮石:떠 있는 돌) 가까이 갔다. 둥글고 넓적한 두 개의 바위가 검고 푸른 이끼에 뒤덮인 채 서로 포개어져 있다. 소풍 오던 시절에는 줄지어 바위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고 바위 위에 올라가 사진도 찍었었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실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틈이 있다고 해서 호기심 가득한 한 아이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실을 가지고 오기도 했었는데 그 결과에 대해선 기억이 없다. 이 바위 또한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되어 야생의 돌로 돌아간 듯 보였다. 진짜 공중에 떠 있었다 해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았을 것이다.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들떠 있던 마음도 세월이 흐르면 차분히 가라앉듯이 말이다. 바위, 너라고 별 수 있겠니?
돌아서서 저 멀리 소백산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유연한 곡선이 파이처럼 겹쳐진 능선은 흐린 하늘과 맞닿아 먼바다 물결처럼 보였다. 미술사학자이자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고 최순우 님이 무량수전과 안양루에서 바라본 소백산맥의 전경을 ‘우리나라의 국보 제0호’로 지정해야 한다고까지 표현한, 바로 그 전경이었다.
나 주차장인데
어디냐? 만나기로 한 친구의 전화가 왔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영주 부석 #영주 부석사 #소백산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 고향 #엄마의 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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