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다.
2016년에 내가 미국에서 교수에 임용되던 시기에 아이도 같이 태어났다. 우리는 이 첫 애를 복덩이라 불렀다.
아이에게 자폐 스펙트럼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말을 처음 듣게 된 건 아이가 만으로 채 2살도 되지 않던 시기였다. 자폐 스펙트럼이란 단어 자체도 친숙하지 않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동안 그 의사를 돌팔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면 상당히 예민하고 명민한 의사였다.
아이의 자폐 증상을 먼저 인정한 것은 아내였다. 나는 내 아이가 자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아내보다 1-2년이 더 걸렸다. 각종 영상과 자료를 찾아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내 아이는 절대 자폐가 아니라 늦된 아이라고 고집했다.
연구자가 직업인 내가 이렇게 믿고 싶은 자료만 선별해서 보는 편견의 함정에 빠지다니… 자식 앞에선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없었다.
내 아이가 자폐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시기에 나는 아내와 자주 다퉜다. 아내는 현실적으로 아이의 자폐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나는 우리 애를 조금 더 믿어달라고 호소할 뿐이었다. 우리 둘은 각자 자기의 생각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아내에게 서운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내가 현명했다.
결국 아내는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갔다. 이중언어의 노출에서 벗어나면 언어가 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한국에서 웨이팅이 일 년이 걸린다는 유명한 자폐 명의들을 만나서 다시 한번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한국에서 감각통합, 언어치료 등 아내는 좁은 장모님 집에서 바둥거리면서 아이 치료에 모든 것을 쏟았다.
그 시기 난 미국의 텅 빈 주택에 혼자 남겨졌다. 일을 하는 거 외에는 많은 자유 시간이 생겼다. 하지만 마음이 우울했고 일 외에는 집 바깥조차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 시간들은 많은 술로 채워졌다. 나는 체중이 급격히 늘어났고 피폐해졌다. 집 안의 고장난 부분들도 고치지 않고 내버려뒀다. 지금도 어떻게 그때 반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아이는 자폐지만 희망적으로 보였다. 의사
선생님들도 이 아이는 나중에 충분히 정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아내는 희망을 안고 아이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아이의 본격적인 퇴행이 이제 막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