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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 Mar 07. 2024

약속만이 남았다

노랑이 이야기2

 대학 동기, 선배들 앞에서 우리 집에는 열세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고 말했다. 첫 수업에서 교수님이 '나에 대한 퀴즈'를 내라고 하길래, 가장 맞추기 힘들 만한 문제를 낸 것이다. 모두 매우 신기해했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신기함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열세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는 가정집이란 '동물농장'보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나 '긴급 출동 SOS'같은 방송에 어울릴 주제였다. 고양이들이 사는 곳이 가정집이 아니라는 점, 내 폰에 그들의 사진이 몇 장 되지 않는다는 걸 그들이 알았다면 후자에 출연할 것을 더 강력하게 추천했을 것이다.




 이름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동기에게 나와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 동기는 '나에 대한 퀴즈' 수업에 없었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 별 대답 없이 그냥 웃고 말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모두 고양이별로 돌아간 뒤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대답은 나만의 약속이 되었다. 


 노랑이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날의 약속이 떠올랐다. 약속 따위 개나 주고 조금 더 빨리 시작할 수는 없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떠난 고양이들을 본뜬 캐릭터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을 써 볼까, 뭐 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노랑이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에게는 그들과 내게 어난 일들을 가감 없이 써 내려갈 용기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쓰는 일은, 가끔은 손끝이 저려올 정도로 두려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되면 쓸 수밖에 없다. 그들과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아주 오래전 했던 약속을 지키는 일이고, 동시에 하나의 계절을 마무리하는 일이다.


 봄인지 여름인지 불명확한 어떤 계절이, 작년 이맘때부터 서서히 나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느낀다. 계절이 지나면 이불도 바꿔야 하고 옷도 새로 꺼내야 한다. 노랑이와의 이별과 그에 대해 쓰는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므로, 두려워한다고 바뀔 것은 없다. 거꾸로 가는 일 없는 계절처럼.




 이런 연유로, 과 내 이야기는 불명확한 결심 혹은 약속 이후 10년도 더 지 어느 여름 문장이 되기 시작했다. 간 써온 글들에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고양이라고는 털 한 오라기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이는 내가 소설적 허구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 타인의 귀에 닿는 즉시 허구가 돼 버리고 마는 것인데.

 내가 보고 느꼈던 어떤 것도 나와 완전히 동일한 시점과 상황에서 보고 느게 할 수는 없으니까.

 



 완벽하고 완전한 허구에의 집착은 돌고 돌아 내가 겪은 일들을 고요히 털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간의 글쓰기는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린 걸음이었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 이별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과의 인연은 이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떠나간 존재들, 그리고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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