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담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는 것을 노랑이와의 일들을 쓰며 깨달아간다. 마음을, 슬픔을, 사랑을 담은 문장에는 오직 내가 겪은 시간과 감각만이 깃든다. 나는 사랑을 담아내고 있다. 꾹꾹 눌러서. 어떻게든.
노랑이가 가고 난 뒤, 나는 어떤 것도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세월의 끝이란 결국 세월을 감각할 존재가 사라진 뒤에야 이른다. 그러니 끝날 것은 없었다.
2년 전, 우리 집에는 예쁜이라는 고양이가 찾아왔다. 시골집이라 주변에 사는 고양이들이 많은데, 대부분 사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쁜이는 달랐다. 누군가 버리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사람을 잘 따랐던 예쁜이는 세찬 바람이 불던 밤 이후로 혼자가 되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함께 있던 형제가 그날 뒤로 보이지 않았다. 예쁜이와는 달리 사람을 경계하던 고양이였다.
홀로 남은 예쁜이는 본격적으로 우리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우리 가족이 밭에 나오면 따라다니며 울고, 우리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고, 때 되면 밥 달라고 울었다. 우리는 결국 그 아이의 임시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중성화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예쁜이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예쁜이. 새끼들은 안쪽부터 한치, 두치, 네치, 뿌꾸, 세치 순이다. 예쁜이는 원래 예뻤지만 새끼들을 낳은 뒤로 더 예뻐졌다.
예쁜이는 자기처럼 예쁜 새끼를 여섯 마리 낳았다. 가장 컸던 새끼 한 마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양이별로 떠났지만, 나머지 다섯 마리는 무럭무럭 자라서 한치, 두치, 세치, 네치, 뿌꾸라는 이름을 얻었다. 우리 가족은 주로 이런 방식으로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이 몇 마리냐가 이름을 결정짓는 셈이다.
예쁜이는 창고에서 우리와 함께 다섯 마리 새끼 고양이들을 살뜰히 키웠고, 심지어 살기 위해 앙상한 몸으로 예쁜이에게 젖동냥을 하러 온 까만 새끼 고양이에게까지 젖을 물렸다. 초반에 예쁜이는 자기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하악질을 했지만, 곧 젖을 허락했다.
우리는 그 용감한 친구를 콩알이라 부르기로 했다. 예쁜이에게 물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창고로 들어왔을 당시 정말 콩알만 했기 때문이었다.
콩알이. 만났을 당시 보다 조금 자란 모습이다. 예쁜이와 새끼들이 살던 창고에 비집고 들어올 당시에는 배만 볼록하고 다리는 앙상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출산 한 달 뒤 예쁜이가 중성화를 했고, 새끼들까지 모두 중성화를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예쁜이는 훌쩍 우리 땅을 떠났다. 다른 고양이들의 습격을 받았을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병이 있어 조용히 죽을 곳을 찾아간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왜 새끼들을 두고 떠났을까? 내심 걱정이 많았지만, 돌아오기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몇 달 뒤, 우리는 걸어서 10분 남짓 떨어진 어느 주택 근처에서 예쁜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얇은 천으로 만든 귀여운 목걸이도 하나 걸고 있었다. 예쁜이는 새끼들에게 우리 집과 우리 가족을 작별 선물로 남겼다. 그리고 자신은 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편안한 묘생을 누리고 있었다. 캔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는 소문이 우리에게까지 솔솔 퍼질 정도로.
청소년 고양이 시절의 뿌꾸. 앞면도 뒷면도 예쁘다. 고양이 특유의 곡선이 살아있는 뿌꾸의 뒷모습을 좋아한다. 뿌꾸 뒤에는 당시 어디서든 새끼들을 지켰던 예쁜이가 물을 먹고 있다.
현재 우리 땅에는 예쁜이가 독립시킨 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보듬었던 존재들이 하나둘 다른 세상으로 떠난 뒤에도, 나와 내 가족은 새로운 생명들과 우연히 만나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 첫 고양이들인 셋, 일등이와 올백이 그리고 꼴매 말고는 한 마리도 돈을 주고 산 적이 없다. 나머지 존재들은 노랑이처럼 예쁜이처럼, 어둠 속에서 불 켜진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존재들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함께 할 밖에.
한때 내 목표는 지금 키우는 동물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난 뒤에는 어떤 동물과도 함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나를 따라오려는 고양이들에게서 번번이 도망쳐왔다. 길고양이들은 츄르 하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 나를 곧잘 쫓아왔는데, 예쁜이처럼 집으로 쫓아오는 존재들까지 피할 길은 없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공중 화장실에 강아지를 두고 간 사람의 이야기를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다. 노년의 주인이 암에 걸린 자신보다 홀로 남을 강아지를 걱정하며 써둔 종이 옆에 앉아있던 강아지. 그리고 그 강아지가 쓰던 물건들. 이런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나의 마지막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예쁜이와 그의 새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잔뜩 움츠러들었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짐을 느낀다. 그들은 우리 손을 탔어도 우리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연 속에서 생명은 훨씬 더 수월하게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내 다리에 몸을 슬쩍 부비고 다시 검불숲으로 들어가 냥모나이트를 만드는, 검불 새로 점점이 스미는 햇살을 담뿍 받으며 낮잠을 청하는 고양이들을 보면서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끝낸다.
왼쪽 상단부터 네치, 세치, 뿌꾸, 한치, 두치.
끝난 것은 없었다. 나와 사랑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와 일곱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았고 그중 일부와 이별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과의 인연은 이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떠나간 존재들, 그리고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 놓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