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가 뭐야? 경쟁에 지친 청년들은 하나둘씩 모여서 공생하기도 한다.
공동체
21세기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불경기의 영향으로 종신 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직장 공동체가 무너졌다.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익숙한 젊은 세대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세대의 문화가 달라 소위 'MZ'논쟁 같은 게 벌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97년생인 나는 내 또래 청년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았다. 인생의 오랜 시간을 '공동체'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대안학교였다. 전교생이 의무 기숙사에서 살아야 했고 공동생활을 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 교육을 한다는 교훈(校訓)을 가진 대안학교였다. 따라서 작은 학교를 지향하여 전교생의 수는 90명을 넘지 않았고, 한 학년에 한 반, 서른 명 이내였다. 이 적은 인원으로 3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다.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을 새도 없이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으로 구성된 '공동체'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많았다. 졸업 이후로도 '대안학교 졸업생'이라는 특이 신분(?)으로 인해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여러 공동체를 경험할 기회가 많았다.
누구라도 그 구심력의 세기만 다를 뿐 공동체(共同體)에 속해 살아간다. 가족 공동체, 학교 공동체, 직장 공동체, 친목 동아리 같은 공동체… 넓은 의미에서 공동체란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는 '좁은 의미'의 공동체다. '좁은 의미'의 공동체들은 공동체에서 관계의 면에 더 집중한다. 공동거주하는 생활공동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조직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이 협의의 개념을 뜻할 것이다.
나는 이 협의의 개념의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조직 내에서 자체적으로 민주적인 의사소통 체계나 갈등 해결 프로세스를 고민하고, 타협점을 찾고자 한다. 불완전하고 완성될 수 없는 인간이 서로 맺는 것이 관계이므로 관계 또한 불완전하고 완성될 수 없다. 따라서 공동체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함께(共) 하나 되어(同) 살아가는 과정이다. 갈등은 공동체라는 과정의 일부다. 따라서 공동체가 갈등을 피하려 한다면 ‘공동체성이 훼손됐다’고 말하고, 소수의 인물이 협의와 갈등 없이 의사결정을 내린다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모인 ‘조직’ 일뿐이다.
우리 사회에도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협의의 공동체가 여기저기 퍼져 있다. 나는 대안학교 졸업생으로 그러한 공동체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 공동체들에서 겪은 이야기를 풀어내보려 한다.
2015년, 서울의 인문학 공동체
201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딜 준비를 하던 나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의 인문학 공동체에 들어갔다. 언젠가 독후감을 비교문학적 접근을 써서 제출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비교문학적 접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내가 전문적으로 비평을 공부해 보면 좋겠다고 하셨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나는 고향에 남아서 '글 쓰는 농부'가 되고 싶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부터 대안학교였고, 그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의나 들으러 다니면서 농사를 짓는, 안빈낙도의 꿈을 그리고 있었다. 그걸 반대한 선생님은 나에게 국문학을 권하고 진로의 이정표를 세워주었던, 말하자면 '은사'님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반대하는 진로라니. 정말 고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아버지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위암 3기로 수술을 받고 요양하는 중이었다. 당시 지원했던 문예창작과 대학에 모두 떨어진 나는 경제적 문제로 재수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서울에 있는 인문학공동체를 추천해 주신 것이다.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넓은 세상을 겪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의 어느 인문학공동체에서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공동체에는 여러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나는 그중 '청년자립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참여 조건이 까다로운 프로젝트였다. 다른 학우들과 함께 집을 구해서 공동주거를 하고, 공부하는 틈틈이 알바를 하면서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일절 받지 않아야 했다. 경제적 예속이 있는 한 진정한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차피 가정형편도 안 좋은 시기였고 가진 것도 없는 나에게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이 공동체에서 소개해준 알바로 나는 '장애인 활동보조(현재 명칭은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일했고, 공동체와 프로젝트의 커리큘럼을 따라 동서양 철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니체, 마르크스, 크로포트킨, 유가와 도가의 고전철학, 돈키호테,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고전을 읽으면서 매주 2회 스터디에 참여하고, 매주 2편 이상의 리포트를 작성해야 했다. 제일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공부는 '반야심경'이었다.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알바를 하면서 생활비, 학비, 식비, 저금까지 착실히 했다. 결국 그때 모은 돈으로 2016년 초에는 프로젝트의 마지막 기획이었던 단체 배낭여행을 떠났다. 원래는 중국의 공자 유적지와 실크로드 쪽만 가기로 했던 여행인데 나는 내친김에 혼자서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인도까지 총 4달 동안 배낭여행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사회에서 만났던 공동체 중에서도 가장 알차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건강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고전 철학과 고전문학이라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내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무조건 옳다고 믿었던 시골 청년의 우물 안 개구리는 밖으로 끄집어 내어져 세상을 배울 수 있었다. 매주 내 리포트를 낭독하면 사람들은 글에 대한 날것의 피드백을 해주었고, 덕분에 욕도 엄청 먹었다. 그 공동체가 어떤 구조였건 간에 인생의 지혜를 탐구하러 모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스트레스받는 일도 드물었다. 공부와 자립과 공동생활, 이 세 가지 규칙만 봐도 갈등이 생기는 게 너무도 당연해서, 그 공동체만의 독특한 갈등 해결 프로세스가 있었다. '푸닥거리'라고 불렀는데, 학우들끼리 묵은 감정을 서로 직면하자는 어떤 의식(?)의 일종으로 갈등 당사자들이 튜터 선생님과 삼자대면을 해서 서로 실컷 쌓아둔 말을 꺼내면서 합의점을 찾는 방식이었다.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할 말 못 할 말 다 꺼내놓고 보는 그 방식이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 인문학공동체에서 '자립'을 재정의한 개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보통 '자립'이라고 하면 자신의 삶을 문제없이 살아가고, 경제적-정서적 의존 관계가 없는 상태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인문학공동체에서는 그런 인식의 결과로 청년들이 '파편'이 되고 있다며 '공생의 자립'을 역설했다. 20대 초반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도 공동주거 시스템 덕이었다. 숫자로만 따져도 무일푼인 내가 서울에 집을 구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다. 공동주거로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고, 공동체의 공동주방에서 돌아가며 식사 당번을 하면서 식비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공동주거-공동생활로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했으니 이제 나에게도 의무가 생긴다. 바로 '관계'다. 공동주거 공동체는 사람들끼리의 갈등에 가장 취약한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의 약속을 따르고 공동생활의 매너를 지켰다.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적은 비용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의식주 기반이 모두 잿더미가 된다. 생존과 직결된 인간관계였던 것이다.
아마 이 공동체에서 더 오래 공부했다면 나는 고등학교 은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문적인 문학 비평을 공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는 2015년, 국내 정치가 요동치고 있었고 나는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골방에서 철학이나 읽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결국 나는 1년 만에 인문학공동체에서 뛰쳐나와 광장으로 나갔다. 이 선택이 앞으로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를 생각하면, 20대 초반에 인문학공동체를 떠난 것은 참 안 좋은 선택이었다. 정치에 연연하는 인간들을 미워했으면서 나 또한 정치에 연연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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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당시 공동체의 생활과 철학을 다른 학우들과 공저로 쓴 책이다.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책 하나에 내 이름 실렸다는 자부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