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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나라의 정원사 Mar 02. 2024

어린 소나무에게

오늘따라 달빛이 환하는구나. 

 늙은이가 되니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다. 이런저런 걱정에 연한 잎을 틔우는 너를 보며 생각이 많아지는구나.

 얘야! 언젠가 네가 물었지.

 “할머니, 머리끝에 빨갛게 물든 건 뭐예요?”

 그때는 대답을 못했다. 나도 내 몸이 왜 그런지 몰랐거든. 그런데 그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 몸은 말이 아니었단다. 재선충이란 놈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놓더니 지금은 이렇게 온몸이 벌겋게 변해버렸단다. 밤마다 간지러운 것은 물론이고 양분을 흡수하지 못한 잎이 시들시들 마르더니 그 병이 온몸으로 퍼지는 거야.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나를 괴롭힌 그 재선충이란 놈을. 재선충은 실 같이 생긴 선충이야. 이 선충은 혼자서는 아무 힘이 없지. 그래서 솔수염하늘소나 북방수염하늘소 몸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기생충이야. 솔수염하늘소는 소나무 껍질을 갉아먹는데, 그때 생기는 상처를 이용해 나무속으로 교묘하게 파고든단다. 그놈이 얼마나 독한지 소나무의 생명줄인 물길을 막아 서서히 말라죽게 만들지. 소나무에겐 정말 찾아오면 안 되는 손님인 게야.


  그렇게 푸르고 싱싱했던 잎들이 힘을 잃고 아래로 축축 처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을 거야. 몸이 말라가는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는 잘 몰라. 지금은 보다시피 단풍나무처럼 몸이 빨갛게 변해 버렸단다. 내가 걱정하는 건 나 하나쯤은 없어져도 되는데 내 몸에 옮긴 재선충과 숙주인 하늘소가 다른 나무로 옮겨간다는 사실이야.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바람 부는 날은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공포에 휩싸인단다. 막아보려고 애를 써도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 재선충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더 많이 퍼져나가거든. 그래서 결심했단다. 산림지킴이들이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뭐라고 말했을 때 난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느꼈단다. 치료 약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절망했지. 이제 시간이 없구나. 온몸이 타들어가니 마음이 급하다.

 얘야, 잠자는 머리맡에서 이 할미가 너에게 우리 소나무의 역사를 말해주었던 것 기억하니? 네가 아마도 사춘기가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나한테 했었지. 그때 넌 많은 장소 중에 하필 왜 이곳에 떨어졌냐고 내게 물었다. 


 우리 소나무는 바람에게서 도움을 받아 번식을 하는 풍매화란다. 그 바람 속에 비밀이 들어있지. 어느 날 비가 오는 날이라 기억한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낙엽 더미 속에서 고개를 힘겹게 밀어 올리는 너를 발견하고 나는 너무 기뻤단다. 행여 이 비에 네가 쓰러지지 않을까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역시 넌 소나무의 자손답더구나. 그 모진 빗속에 뚫고 연하고 뾰족한 잎을 내밀었을 때 넌 내게 선물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어. 마음이 뭉클하게 차올라할 말을 잊었단다. 난 그때 결심했지. 내가 받은 이 특별한 선물을 죽을 때까지 지켜내라고 마음먹었다. 얘야, 지금에야 말하지만 우리만큼 사람들하고 친한 나무도 없단다. 옆에 있는 갈참나무가 아무리 잘난 척 해도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넌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 넌 궁금한 게 많았어. 내 옆구리에 찍힌 상처를 보고 또 물었지.

 “할머니, 옆구리에 상처는 뭐예요?”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 이야기를 하자니 나도 참 오래 살았구나.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는 대대적으로 또 험준한 산을 하나 넘었지. 일본군이 우리의 외피를 도려내고 기름을 내겠다고 늑달같이 달려들어 상처를 낸 자국이다. 우리 몸 안에 송진을 노린 거지. 그때 한참 클 나이였는데 주위의 소나무들이 땔감으로 무자비하게 실려갔다. 나 역시 역사를 피해가진 못했다. 외피에서 하얀 속살이 보일 때까지 무자비하게 놈들이 나를 괴롭혔다. 생각해 보니 한 많은 여정이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와 또 6.25 전쟁을 치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 역사를 묵묵히 바라보고 내가 생명을 다하는 날 너에게 증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얘야, 잘 들어라. 이만큼 잘 자란 데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관여했다. 나는 우리 가지들 틈 사이로 잘 비집고 들어온 햇빛과 바람과 비에 감사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 이렇게 큰 나무가 된 것은 아니더구나. 자연의 이 모든 것들은 약속에 의해서 나무들이 자랐고 숲이 되었다. 너는 이 할미의 말을 잘 듣고 이젠 네가 이 숲을 지켜야 한단다. 여러 나무와 새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말아라. 새들이 오면 가지를 벌려 쉬게 하고 참나무들이 앞다투어 햇빛을 받게 되면 좀 양보를 하고 살아라. 니 발아래 개미들이 오글거려 시끄럽게 하더라도 너의 큰 품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낙엽이 떨어져서 제 한 몸을 희생하는 미덕을 배워라. 나는 이제 재선충으로 인해 이렇게 없어져도 내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은 내 병이 너에게 옮아갈까 그게 늘 마음에 쓰였다. 다시 말하지만 선물로 온 너는 내겐 특별한 의미였다. 너를 위해서도 나는 없어져야 한다. 바람이 부던날 내가 얼마나 용을 썼던지 밤새 앓았던 걸 넌 기억 못 할 거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병을 안고 가고 싶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재선충도 이젠 없어져야 된다. 지금은 너희들 세상이다. 재선충이 오지 않도록 뿌리에 물도 많이 보충하고 늘 몸이 마르지 않게 관리를 해라. 계절에 순응하고 자연의 법칙에 따르다 보면 재선충도 곧 멸할 날이 올 거다. 이 할미는 그걸 믿고 있다. 얘야, 마지막으로 고마웠다. 나는 네가 내 옆에 와 주어서 내가 그 모진 세월의 아픈 기억을 다 잊을 수 있었다. 내 마음엔 상처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내게는 항상 네가 있어서 행복했다. 넌 내가 죽어서도 기억해야 할 소중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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