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걸을 때 늘 뒤꿈치를 쿵 쿵 내려찍으며 걸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살던 대신연립 3층에서는 아빠가 건물에 들어왔음을 건물에 울려 퍼지는 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둔탁한 발걸음이 연립의 계단을 지나 현관문을 지나면 더 커다란 울림이 내가 누운 이부자리에 퍼지곤 했다. 쿵쿵 내려 찍는 소리의 정도를 통해 아빠의 그날 기분을 알아낼 수 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는데, 아주 나중에야 왜 아파트에 살 수 없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발소리가 평소보다 거칠고 깊은 날에는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귀는 쫑긋 거실을 향해 두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거실에서는 욕지거리가 들렸다. 이불에 파묻혀 숨을 죽이고 있던 나와 3살 터울의 언니는 언제라도 거실로 뛰쳐나가 아빠의 팔이나 허리춤을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는 팔을 잡아, 내가 허리를 잡을게.’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아빠의 완력을 두 명의 소녀가 이겨낼 수 있는 전략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우리의 존재를 거실에 던져 놓는 것이 중요했다. 두 딸의 존재가 아빠의 완력이 힘을 잃게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하지 않았고 제발 그래 주기를 바라는 바람만 있었을 뿐이었다
쿵쾅대는 울림을 느끼며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된 나는, 때때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한 발 한 발을 쿵 쿵 내려찍으며 집에 들어오곤 했다. 대신연립에서 나와 감나무집 3층에 살던 때에는, 혼자 있는 집이 쓸쓸하고 적막하고 슬퍼져 엄마에게 전화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분에 못 이겨 목이 터져라 악을 쓰며 울었고 1층에 살던 아주머니가 올라와 큰일이 났냐며 집을 살피기도 했다. 나는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악쓰기를 멈출 수가 없었고, 쿵쾅거리는 걸음을 멈추지도 못했다. 삼촌과 고모들은 나를 보며 아빠를 빼다 박았다고 말하곤 했다.
아빠의 기세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쯤 풀이 꺾이기 시작했다. 사춘기도 끝나고 악쓰기를 멈춘 나는 더 이상 아빠를 견딜 수가 없었고, 아빠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을 나왔다. 아빠의 울림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동을 느끼며 살고 싶었다. 어느 날 아빠는 나에게 자기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물어왔다. 나는 아빠의 둔탁함이 나와 언니, 엄마에게로 와서 얼마나 크게 울렸는지, 아빠 자신은 모르던 아빠의 둔탁한 모든 것들이 나를 얼마나 쿵 쿵 내려찍어왔는지 말했다. 아빠가 변하지 않으면 아빠는 반드시 혼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 후 가만히 앉아 반찬투정만 하던 가부장은 퇴근 후에 설거지하고 밥을 안치며 얌전히 아내의 퇴근을 기다렸다.
본가로부터 독립을 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애인은 나의 걸음걸이를 지적해 왔다. 애인은 그 당시 광명의 한 아파트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해 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곳에서 내가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아빠의 딸임을 알았다. 쿵 쿵 뒤꿈치를 내려찍으며 걷는 나의 걸음을 두고 ‘발망치’라고 한다는 것도 애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애인의 아파트에서 나는 새로운 걸음마를 뗐다. 애인은 스케이트를 타듯 한 발 한 발을 미끄러뜨리는 섬세한 걸음걸이를 알려주었다. 나는 애인에게서 받은 스케이트를 신기 위해 여태껏 달고 살았던 발망치를 조금씩 떼어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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