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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로 가는 가장 먼 길 -2

오타루에는 고상한 나폴리탄이 살고 있어요.

[비행기 탑승 7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삿포로 공항]

인스타에 여행기를 올릴 때면 늘 쓰는 말이 있다.

"여행 갈 때 해피아워, 라운지 검색하시는 분들, 조용히 해 주세요. 여기는 숯불 향 맡으며 고기 굽는 게 소원인 불쌍한 어미아비들의 공간입니다"

맛집이라면 2시간 줄을 서도 행복한 나에게(신혼 때 이걸로 차암 많이 싸웠지..),
맛집 리뷰로 팔만대장경 분석집을 낼 수도 있는 나에게,

만 5세, 2세 두 아이와의 여행에서 맛집 방문은 대단한 사치이다. 내가 뭐 큰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멤버에 따라 목표는 조정된다.
- (온 가족) 4인조로 갈 때 : 삼시세끼 먹기 (..)
- (딸과) 2인조로 갈 때 : "식당에서" 삼시세끼 먹기

지금은 가버리신 우리 (전) 상무님 말씀처럼, 늘 목표는 실현불가능해야 하니까(ㅡ.ㅡ) 그리하여  올해 만 5세 따님과의 여행 목표 바로,
 

"감성 식당"에서 1일 1끼 먹기"

여행 내내 삿포로 근교 오타루로 일정을 잡은 나는 상당히 초조했다. 소도시의 밤은 이르게 찾아온다. 식당도 대부분 7시~8시면 마감하는데, 이미 오타루 도착하니 7시가 지날 무렵. 심지어 딸내미는 7년 인생 처음 보는 눈의 왕국에 매혹돼 길가에서 뒹굴기 시작, 총체적 난국이었다.

10m가는데 10분.. 이 곳의 시간은 왜이리 늦게 가는가?

'첫날부터 목표달성 실패할 순 없어'


구글맵에 저장된 수많은 노란 별을 뒤로하고, 난 당장 직선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을 검색한다. 직감적으로 한 식당 리뷰에 꽂혔다. 바로 [충격적인 맛의 나폴리탄]


'충격적인 맛이라.. 놓칠 수 없지.'


길바닥을 뒹구는 개, 아니 딸내미의 목덜미를 물어 식당에 입장했다.

확신의 갬성 간판. 느낌이 너무 좋아

누가 봐도 영어의 ㅇ도 모를 것 같은 주인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난 느꼈다. 거절각. 그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약간의 갈등을.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마감을 하려던 느낌적 느낌? 하지만 나도 베테랑답게, 바로 치트키 투입했다.

"스미마셍.. 코도모가 아리마스께도... 다이죠브 데스까..?" [생존 일본어. '죄송합니다만... 아이가 있는데...(식사) 괜찮을까요..'] 그리고 필살기로 미안하고 공손한 웃음을 씨익-딸내미 등을 스윽 밀었다. 할아버지는 딸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크, 이게 바로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실제로 내 뒤에 들어온 일행은 마감했다고 입장하지 못했다.)

평범해 보이지만 맛은 평범하지 않았어


충격적인 맛이 나폴리탄과, 눈이 번쩍 뜨인다는 하이라이스를 시킨 나는, 단출한 외관에 잠시 실망했다가, 정말로 충격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껏 나폴리탄을 누가 단순한 스파게티 같다 하였는가! 맛있음을 뛰어넘어 고상하기까지 했던 나폴리탄 하나만으로도, 이 식당을 정말로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아름다운 목조 인테리어는 덤)

고독한 미식가에 나올법한 무드

엄마의 평가와 다르게 딸내미는 영 시원찮게 깨작대서 잠시 내 성질을 돋구었지마는, 나는 나의 감정까지 물들이지 않고자 (숨을 크게 몰아쉬며) 노력했다. 그것이 나의 여행 필승법이다.

지친 몸, 꽤나 추웠던 날씨, 허기진 상태, 그리고 눈의 왕국에 매료되어 먹은 첫 끼라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것일까? 뇌가 혀를 지배한 것일까? 삿포로에서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난 그 나폴리탄을 떠올린다. 추억보정인지 아닌지 올 겨울 다시 가면 밝혀지겠지.

역시, 여행의 최고 원동력은 늘 핑계 투성이다.


#1일 1 감성

#미션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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