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지식의 차이는 그 유효기간의 유무이다!
나는 매일 새벽에 전철 타는 시간보다 약 20분 먼저 역에 도착하여 근처 마켓에서 내림 커피로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 들고 역 주위를 산책하면서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새벽에 내가 어떻게 늙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백영옥 소설가가 말했듯이 인간은 세월이 가면 변하는 것이 섭리라면, 좋은 쪽으로 많이 변했으면 좋겠다 싶다.
공자께서는 사람은 다음 네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으며,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다음이고, 곤경에 처해서 배우는 사람은 또 그다음이며,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으면 하급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1)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2) 학이지지(學而知之): 배워서 아는 사람
3) 곤이학지(困而學之): 곤경에 처해야 배우는 사람
4) 곤이불학(困而不學): 곤경에 처해도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
금강경(金剛經)을 새롭게 해석하는 김원수 법사는 ‘지혜’를 생이지지(生而知之), ‘지식’을 학이지지(學而知之)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타고나지만, 분별심—다른 말로 탐진치(貪·瞋·癡)로 인해 그 본래의 참모습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전생에서 이미 익힌 지혜가 현생에서 별도의 학습 없이 저절로 드러나는, 인간 본래의 상태인 생이지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인해 원치 않았던 이별을 해야 했던 첫사랑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설렘처럼, 망상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멀어졌던 부처님의 마음과 지혜를 다시 마주하는 감격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탐심, 貪心),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조급해하며 분노하는 마음(진심, 瞋心),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어리석고 자만한 마음(치심, 癡心)을 없애면, 생이지지(生而知之)로 태어난 본래의 참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득도가 성철 스님과 같은 위대한 수행자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깊은 신심만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김원수 법사는 이러한 분별과 망상을 없앨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수행법을 제시한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고, 금강경을 꾸준히 수지 독송하면, 마음속의 분별과 망상이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마음으로 바뀌어 결국 부처와 같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불교의 철학적 수행이나 명상 중심의 접근과는 다른 길이다. 불교는 철학이나 수련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시는 종교이며, 그 부처님은 외부 세계에 형상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형상 없는 부처님, 즉 우리 내면의 본래 마음이다.
그렇다면 지혜와 지식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김원수 법사는 그 차이를 ‘유효기간의 유무’로 설명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인 금생(今生),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前生), 그리고 죽은 이후의 내생(來生)을 아우르는 불교의 삼세설에 따르면, 지혜는 삼세를 관통하는 영원한 진리지만, 지식은 일정한 유효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폐기되어야 할 분별과 망상에 불과하다.
유효기간이 지난 지식을 맹신하는 행위는 마치 상한 음식을 섭취해 독소가 퍼지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결국 파멸로 이끈다. 나는 조선을 지배했던 엘리트 계층인 사대부들이 사대주의와 성리학이라는 유효기간이 지난 지식을 절대시하며 그것을 끝까지 고수한 결과, 나라 전체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국민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긴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지혜와 지식의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재미 소설가 김은국의 말처럼,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은 단지 이름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다.
원로 스님들이 제자들에게 책을 읽거나 공부하지 말라고 당부한 이유는, 지식의 축적보다 지혜의 깨달음을 수행의 본질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여정 속에서, 품격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의 절실한 화두인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깨달음이 의외로 단순한 수행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깨달음은 부처님과 선지식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 믿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의 선택이 곧 지혜와 지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