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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뒷마당 풍경

애기수국의 겨울채비

by 화수분




수요일엔 아무 일도 없어요.

부지런하게 맘먹으면 혼자라도 산에 다녀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먼 산에는 못 가고 만만한(?) 모악산에 갑니다.

30분 운전하고 가서 3시간 산행하고 와서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793.5m 높이의 산이라 만만치는 않아요.


단풍이 불탄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갔지요.

과연 그랬습니다.

은행나무, 애기단풍나무들이 산아래를 뒤덮고 빛을 내고 있더라고요.


일찍 온 산객들이 대원사 뜰에 앉아 쉬고,

절집에 사는 재색 토끼하고 간식을 나누고 있었고요.

나는 어서 정상을 다녀오려고 막 종각옆 쪽문을 나서려는 순간!

어? 뭐지?

불타는 단풍과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저것들은?

새하얀 보자기를 씌웠나?

부직포일까?

꼬마 눈사람도 같고, 풍선 같기도 하고, 얼핏 흰 토끼인가?


아! 아마도 애기 수국 들일 걸?

지난봄부터 그 텃밭에는 한 뼘이나 되는 수국들이 심겼으니까.


곧 겨울이 오면 어린 수국들이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대원사 스님이 옷을 입혀 주셨나 봐요.

몇 년 나이 든 수국들은 겨울을 잘 나지만

아직 어린것들은 옷을 입혀야겠지요.


깊은 가을 모악산!

대원사 주변은 온갖 색깔의 향연인데

새하얀 '색' 하나 더했네요.

이제 완전한 만 색(萬色)의 잔치네요.


한 여름 땡볕에 이 산을 오르자면 죽을 둥, 살 둥 힘에 겹더니

그 세월 다 가고 호시절을 만나서

이젠 수월케도 오를 만하네요.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계단, 돌, 나무......


이파리는 새싹에서 낙엽까지 나고 지고 떠나가고

꽃, 너도 피고 지고 떨구는구나.

그래도 항상 자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것들이 있어서 또 만나지.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

소멸되지 않고 버틴다는 것.

가고 오는 것들을 기다려 준다는 것.

얼어 죽지 않도록 따뜻하게 감싸준다는 것.


나는 낮은 산 갈림길의 이정표라도 되고 싶어.

혹시 내게도 귀한 꽃이 돌아올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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