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권정치와 전군체제
그리스 수도 아테네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이름만큼이나 역사가 깊다. 스파르타와 함께 폴리스 대표적 도시국가였다. 기원전 8세기 전후로 귀족들이 정치․군사적 권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왕정이 약화된다. 그러자 교역과 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과 귀족들 간 대결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왕정으로 시작해 군주정, 다시 민주정 등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발전해갔다.
문제는 어디서나 존재했다. 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스스로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시민이 늘어났다. 이때 아테네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솔론(Solon)이 등장한다. 정치가이자 탁월한 장군이기도 한 그는 기원전 594년, 재산 정도에 따라 정치적인 권리를 차등을 주는 개혁, 금권정치를 단행한다. 특히 부채노예를 금지하고, 그 스스로 읊었듯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팔려간 사람들과 빚의 멍에를 피해 이국땅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아테네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참정권은 아테네에 거주하는 사람 중 여성, 이방인, 미성년자, 노예, 전과자, 빈민 등을 제외하면 10%에 불과했다. 이는 플라톤의 ‘국가론’으로 진화(?)하면서 아주 먼 훗날 존경받는 지식인, 교육을 받은 귀족에게 권력을 준다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미국 헌법의 토양이 된다.
금권정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부추겼다. 정치가인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빈민들 지지를 이끌어내며 이들을 기반으로 권력 중심에 선다. 귀족은 귀족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제한된 권력행사에 만족해야 하는 금권정치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 결과는 두 신분 간 극심한 대립을 가져왔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했던 빈민세력을 등에 업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권을 탈취하다시피 하여 참주에 오른다. 계략과 권모술수에 능했던 그는 지지기반인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폈다.
그가 죽자 아들 히피아스가 기반을 이어받았으나 독재로 치달으며 폭정을 일삼자 참주 능력에만 의존하는 참주정은 결국 붕괴를 앞당기게 된다. 아테네 귀족들은 스파르타 군대를 이용해 그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페르시아로 도망친 히피아스는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길잡이를 자처하며 훗날을 도모하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죽는다.
이후 그리스는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평의회를 설치하고 아테네에 참주의 등장을 방지하기 위한 ‘도편추방제’가 생겨났다. 깨진 도자기에 독재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적어 600표 이상이 나오면 10년 동안 해외로 추방하는 제도다. 우리나라도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무지하나 신념에 찬 만세돌격대로 인해 부작용이 너무 커 아무래도 불가능할 듯하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은 민족에게 아픔은 반복 된다" 몸서리 치도록 끔찍한 말이다.
폴리스 중 아테네처럼 민주정으로 발전한 경우와 달리 귀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폴리스가 스파르타다. 스파르타인은 피정복민 노예 헤일로타이(heilotai)와 주변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위에 군림했다.
스파르타는 중장보병제를 가장 빨리 채택하면서 전시에는 시민이라면 군국주의적인 제도에 참여해야 했다. 외부 시각에서는 귀족정 성격이 강하지만, 스파르타 그들 스스로는 매우 합리적인 민주정이라고 생각했다. 스파르타에는 왕이 두 명이 있었다. 이들은 세습가문에서 선출되는 귀족 대표자였지만, 군사지휘권만 지녔을 뿐 그 어떠한 정치적인 행위에도 간섭할 수 없었다. 행정은 다섯 명의 집정관이 주도했으며, 관직 감시역할도 담당했다. 특히 집정관은 노예 헤일로타이 감시와 탄압이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스파르타 신민은 20세부터 60세까지 병역 의무를 졌다. 유사시에 병장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병영생활을 하면서 똑 같은 토지를 배분받았다. 이 토지는 피정목민인 노예에 의해 경작되면서 신민으로서 균등한 대우를 받았다.
헤일로타이에 의해 음식이 만들어지고, 차려지면 시민 모두가 함께 식사를 즐겼다. 사정이 이런 만큼 불쌍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는 헤일로타이 감시가 가장 중요했을 법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다양한 정치적인 요소로 인해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인근 그리스인에게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 된다. 똑 같이 먹고, 누리며 즐기는 삶은 대를 이어 양산되는 헤일로타이라는 노예가 있어 가능했다. 물론 헤일로타이는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제한적이나마 재산도 모을 수 있었지만,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 하였다.
'국가'를 쓴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인 국가체제라고 한 스파르타였지만, 그곳은 우리 아니면 모두 적이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보다 모든 초점이 국가에 맞춰져 있었다. 플라톤이 극찬 하였으면서도 스파르타로 옮겨가 살지 않은 이유도 아마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스파르타, 상상의 확장일지 몰라도 사족을 붙이자면 다양성을 부정하는 파시스트의 원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고맙습니다!
까르페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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