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명의 줄기세포
○ 신화의 나라 고대 그리스
그리스 국명 어원은 이집트 한 시장에서 발견된 아르메니아 고원 히타이트 점토판 설형문자에 의해 자세하게 밝혀졌다. 미케네 시대에는 아카이오이(Achaioi)로, 몇 세기 후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도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이들도 원래 지금의 그리스 땅 원주민이 아니다. 기원전 6천 년경에 신석기 시대부터 살았던 사람들과 소아시아계 민족이 이동해 살던 곳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밀려오면서 박힌 돌을 뽑아냈다. 제우스 형제들이 크로노스와 티탄족을 물리쳤다는 그리스 신화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다.
어찌되었던 간에 발칸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그리스는 진정 신성의 땅이었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 결혼 수호신이자 제우스 아내 헤라, 태양의 신 아폴론,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바다의 신 포세이돈, 달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 등을 비롯해, 아레스, 디오니소스, 헤파이스토스, 판 등 이외에도 곁가지까지 연결하면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이들이 엮어내는 신화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정신세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 그리스 문명의 탄생 - 에게해
그리스는 산악지형으로 본토를 비롯해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동안 에게해를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중기 청동기 크레타 섬에 일명 미노아문명과 뒤이어 그리스 본토에서 발현된 미케네문명, 즉 에게해를 둘러싸고 형성된 이 두 문명을 합쳐 에게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 크레타 사회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경 전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비교적 자유와 평등한 사회구조에서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이룬다. 오리엔트세계, 특히 예술과 과학이 발달되면서 상형문자까지 창제한 이집트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우의 미로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지었다는 크노소스궁전이 있는 곳이다. 궁전을 지은 다이달로스와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 도움을 받은 테세우스가 실타래를 달고 들어가 반인반우 미로타우로스를 죽이고 돌아온다는 신화의 탄생지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잊은 채 태양 가까이 올라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 전설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이야기가 1900년 영국인 고고학자 아서 존 에반스에게 발견된 후 신화와 역사가 뒤섞이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화려했던 크레타 문명은 BC 1400년경 티라, 즉 산토리니 화산의 대폭발과 지진, 해일 등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 식물인간 상태로 접어든다. 설상가상 그리스 본토에서 기세를 떨치던 미케네 침략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크레타 문명에 결정타를 가한 미케네문명을 알아보자. BC 2,000년부터 중기 청동기에 발칸반도 북쪽에서 아카이아인이 남하했다.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둥지를 튼 이들은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주위를 평정해갔다. 특히 앞선 크레타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미케네는 BC 1,500년 전부터 강력한 해양기술을 바탕으로 지중해 동부 해상교역권을 장악하며 승승장구 한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트로이와 전쟁을 일으킨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도 이곳 미케네 왕이었다. 물론 신들의 대리전으로 번지게끔 묘사된 이 대서사시는 다만 전설 속 이야기였다.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나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납치되면서 전쟁의 불씨가 된다. 이 이야기 시작에는 불화의 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를 둘러싼 여신들의 시기와 질투의 사연이 담겨 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과 관련된 신화 하나가 떠올라 잠시 돌아서 가기로 한다. 아가멤논은 명궁이었다. 그가 어느 날 사냥을 하면서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도 나보다 못할 것이다”라며 입방정을 떨어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산다. 트로이 정벌을 떠나기 위해 그리스 바다에 정박했던 배들이 출정하려 했지만, 역풍이 불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때 예언자 칼가스가 아르테미스 노여움으로 인해 그런 것이니 아가멤논의 외동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아가멤논은 딸에게 아킬레우스와 결혼을 시키려한다고 속여 바닷가로 데리고 온다. 이때 사정을 안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뛰어와 울면서 사정한다.
“당신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며 뭐라고 기도할래요? 수치스런 출발에 걸맞은 비참한 귀향을 빌래요? 내가 당신을 위해 복을 빌어주기를 바라세요?”
아내의 절규에도 아가멤논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피게네이아는 제단에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예언자의 칼을 받았다. 그녀 역시 죽기 전 아버지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저를 죽이지 마세요.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땅 밑을 보도록 저를 강요하지 마세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다.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마치 슬픈 노랫말처럼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가멤논이 딸에게 스스로 재물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 군사들에 의해 도륙을 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가멤논은 전쟁에서 돌아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인간 욕망은 끝없다. 사령관이란 중책이 야욕을 부추겨 부녀지간 정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연이어 부모와 자식, 천륜, 자연이 맺어준 정마저도 더럽히게 되나보다. 결국은 호메로스가 천재다.
각설하고, 이렇게 찬란했던 미케네도 기원전 1,100년경 북쪽에서 철기문명으로 무장한 도리아인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다. 달마티아, 알바니아 지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몰려들기 시작한 이들은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섬을 근간으로 스파르타 등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소아시아는 물론 이탈리아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기염을 토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철제무기로 무장한 이들을 헤라클레스 자손의 귀환이라고 했던 도리스인 남하는 미케네에 살던 사람들을 그리스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후 그리스에는 암흑의 시대가 대략 300여 년간 지속이 된다.
여기서 잠깐! 사실 기록이 없어 역사가들이 암흑이라고 하지만, 이들 도리스인들은 거대한 돌기둥에 세로줄의 홈이 있는 도리아 양식을 발전시켰고, 훗날 로마 건축에 모태로 거듭난다. 실용적이며, 튼튼한 구조로 인정받는 콜로세움 아래층 기둥도 도리아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특히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로 인정받는 아테네 파르테논신전만 봐도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