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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Sep 02. 2023

동방정교와 로마 가톨릭

콘스탄티노플 황제와 로마교황




인류의 사랑과 용서란 대전제, 꾸준하게 아래로부터 전파를 탄 가톨릭의 생명력은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보편적인’, ‘일반적인’의 그리스 말 카톨리케 어원인 가톨릭이 로마 종교의 하나로 합류했고, 박해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갖고 귀신처럼 살아났다. 강한 결속력, 순교로써 박해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집권세력은 공포심을 느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3세기가 지나자 생존의 기력이 확연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밟으면 밟을수록 확산일로를 걷던 종교에 대제국 로마의 에너지가 달렸다. 


종교는 백성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는 절대적인 요소였다.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종교끼리 느닷없이 동화되는 법은 없다. 태양신을 숭배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서기 312년에 로마 북부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고 하면서 가톨릭에 종교의 자유를 준다. 




드넓은 제국을 한곳으로 모을 구심점이 필요했던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뒤이어 서기 322년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식 종교로 인정되었다. 325년에 로마 상층부로 스며든 가톨릭이 392년에 일취월장 로마의 국교로 등극한다. 이로써 로마가 현실적으로 모든 종족과 동족이 하나의 종교 아래 흡수되거나 흡수하는 정신적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 



성소피아대성당


330년 그는 수도를 발칸반도의 동쪽 끝자락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했다. 그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이 맞닿은 지금의 이스탄불, 훗날 발칸반도에 얽히고설킨 아비규환 세상이 될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황제가 곧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교회는 갈등의 링에서 본격적으로 맞붙는다. 기독교 정통성의 자부심이 충만한 로마 교회와 황제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콘스탄티노플 간의 대결 구도는 필연이었다. 갈등이란 증오의 프레임을 만드는 증폭의 마력이다. 콘스탄티노플로서 로마교구는 안티오키아교구, 예루살렘교구, 알렉산드리아교구 등 하나의 교구에 지나지 않았다. 제정일치 시대 황제가 수도를 이전함으로써 교권도 함께 옮겨왔다는 뜻이다. 


수도가 옮겨간 뒤의 이탈리아반도는 폐허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텅 빈 로마는 게르만 민족 등 이민족 침략에 좋은 먹잇감이 된다. 그러자 로마 주교는 게르만 장수를 고용해 옛 권위를 부활하려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게르만 장수에 의해 권력침탈과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를 부정하면서 갈등에 부채질한다. 


476년 게르만 장수 오도아케르가 서쪽 로마를 점령하자, 결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서로마 교권이 차츰 높아지는 선순환을 낳았다. 굳이 콘스탄티노플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기독교가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막바지에 몰린 사회는 채찍보다 그들의 향수를 불러내 증오심을 자극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경제와 교권마저 동방으로 옮겨간 뒤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경쟁심리가 발동하면서 새로운 지도자를 찾게 되고, 당시 그리스도교 수장 로마 주교를 옹립하여 그에게 영적, 세속적 권위까지 안겨버린다.    



성화와 같은 아이콘은 로마 가톨릭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기독교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그러나 518년, 유스티아누스 1세가 황제에 오르면서 이탈리아 로마를 되찾는다. 그는 ‘신이 하나, 교회도 제국도 하나, 황제도 하나’란 구호를 내걸고 교회의 분열을 봉합하려 애썼다. 교리 문제를 방치하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정치 문제로 번지게 마련이었다. 어떻게든 난제를 풀어야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봉합에 그쳤고, 그가 죽자 예수가 그랬듯 3일 만에 갈등이 부활한다.      












교리논쟁은 조선시대 이기론理氣論를 두고 죽음도 불사했던 파벌적 논쟁과 비슷하게 닮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기론, 즉 이理(스스로)와 기氣(에너지)의 원리를 통한 세상만물의 존재와 움직임에 대한 이론이다. 성리학이 발전되면서 논쟁이 확산되자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정립되면서 유학에 발전을 가져왔다고들 하는데, 장돌뱅이 시각으론 기실 쓸데없이 논쟁으로 국력이 소진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이론의 차이를 그리 힘들게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말을 탄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이때 사람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리론, 말이 간다고 생각하면 주기론이다. 간단명료하지 않는가. 이 외에도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중국 주나라 주자가 말한 것을 모은 《주자가례》를 주고 예송논쟁을 벌여 얼마나 많은 정적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동서로마의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이 또 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4차 십자군이 교회 십자가를 장검으로 사용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주민을 살육하고, 약탈과 동시에 도시를 불사르는 등 그들의 만행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다. 이는 다분히 서로마 교황의 부추김이 한몫을 했다. 십자군전쟁은 신을 빙자한 경제적, 정치적으로 이용된 침략전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기독교로서는 일종의 자해인 셈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립의 각을 세운 동방의 정교와 로마 가톨릭 두 종교 간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동방정교東方正敎는 콘스탄티누스 대제(274년~337년)가 비잔티움으로 로마의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된 동유럽 중심이 되는 신앙이다. 훗날 발칸반도 사람에겐 신앙을 넘어선 민족의 자존심이자 이민족 지배에 항거하는 절대적인 에너지원이다. 부활, 즉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다는 뜻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상징이다. 부활절을 ‘동방의 날’, 즉 이스트 데이(East Day)라 부르며 표준, 원래 모습 그대로의 교회 ‘오서독스 처치’(Orthodox Church)라고 한다.      




로마 가톨릭에 있어서 교회란 구원의 장소다. 성직자는 구원을 실현하는 막강하고도 이상적인 영적 영역을 부여받았다. 교인의 공동체 교회와 그리스도 교리에 의해 성직자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신의 영역과 인간 세계는 엄연히 구별되고, 교회와 성당이 화려한 까닭은 신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동방정교의 교회 건물은 상대적으로 소박하다.(자칭 제3의 로마라고 했던 러시아는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수평적 구조 동방정교의 성직자는 개인적인 권위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신 앞에서 모두 동등한 지위라는 뜻이다. 생활 속 깊숙이 뿌리박힌 신앙의 실천이 중요했다. 하느님과 인간의 세계의 분리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 신이 함께 한다는 종교적 개념 때문에 정교일치政敎一致는 당연했다. 불교 선종禪宗의 견성성불見性成佛 내용과 살짝 통하는 맛도 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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