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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Sep 04. 2023

마라톤 전투

서세동점의 기원



    

기원전 550년경 지금의 이란 땅에서 번성했던 아케메네스왕조로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529년에는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에 의해 통일제국이 탄생한다. 서아시아 패자 페르시아가 기원전 6세기 나일강 유역의 3천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간 동안 자연재해 한번 없이 풍요를 누리던 이집트를 평정하고, 여러 갈래로 갈등을 일으키던 오리엔트를 하나로 묶는다. 힘을 축적한 페르시아는 지중해로 진출해 소아시아 그리스 식민지를 야금야금 삼켰다. 


당시 다리우스 1세는 막강 군사력을 배경으로 기원전 513년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수중에 넣으면서 필연적으로 그리스와 한 판 세기의 대결을 불렀다. 전시에 돌입한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위해 도시국가들이 힘을 모았다. 해상무역에 사활이 걸린 아테네로선 제해권을 페르시아에 넘겨줄 수 없었다.      


다리우스 1세 : 무료 미디어 저장소 Wikimedia Commons 제공


다리우스 1세는 항복을 권하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이오니아에 군대를 보내 진압에 성공한 후 아테네 원정에 나섰다. 서양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세계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동서양 전투가 개시된 것이다. 트라키아와 그리스 북쪽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이 신들의 나라 편이었다. 바다에서 폭풍과 파도가 몰아치는 바람에 300여척의 배가 침몰하면서 다리우스 1세는 분을 삭이며 회군해야 했다.             

  

지중해를 장악한 나라가 패자였다. 다리우로서는 지중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절치부심,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제2차 정벌에 돌입한다. 당시 페르시아 군대는 600여척 군함의 막강 해군을 중심으로 보병 2만5천 명과 기병 1천 명 등 군사들 사기마저 높았다. 이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스 낙소스와 카리스토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에레트리아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불 보듯 빤했다. 악전고투, 페르시아를 상대로 처절하게 대항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페르시아는 사르디스의 성역을 불태운데 대한 복수로 시민들을 모두 페르시아로 데려가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창끝을 아테네로 향했다. 


이때 아테네는 수성전을 펼쳐 스파르타군이 오기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나가서 맞서 싸울 것인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다행히도 아테네에는 밀티아데스(Miltiades)라는 출중한 장군이 있었다. 그의 설득으로 아테네군사는 동북부 마라톤 평원에서 막 상륙한 페르시아 주력부대 맞았다. 이들 그리스는 시민군 1만 명이 전부였지만, 델포이의 아폴론신전에서 자신들이 승리 하리라는 신탁을 듣자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다. 밀티아데스 군대와 달리 페르시아군은 1만5천 명이 해안에 운집해 있었고, 나머지 1만 명은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분산해 항해를 이어갔다. 이를 확인한 밀티아데스는 급박해졌다. 아테네에 페르시아군 공격을 막을 군사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그가 생각해낸 것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양익포위전술이었다. 적은 수의 아테네 군사를 페르시아군과 대등하게 맞서게 한 후 중앙을 얇게 양쪽은 두텁게 군사를 포진시켰다. 페르시아군은 평소와 같이 종대로 대열을 맞춘 전술로 포진했다. 앞을 향해 나아가던 아테네 군사는 페르시아군과 거리가 좁혀지자 진군 속도를 높였다. 중앙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낮았다. 페르시아군은 궁수도, 기병도 없는 그리스군을 오합지졸로 얕보았다. 화살의 사정거리에 들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쏜 살이 빗발처럼 쏘아댔다. 아테네 군사들은 진격 속도를 높여 사정권을 벗어나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 양측의 뛰어난 군인들이 페르시아군대 옆구리를 쳤다. 적진 뒤를 돌아 포위에 성공하면서 전열이 흐트러진 페르시아군을 부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양측을 뚫고 들어오는 아테네군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불과 15분여 만에 거둔 아테네 승리였다.      


아테네군 피해는 192명으로 미미한 반면에 페르시아군은 6천4백 명을 잃어야 했다. 서양 역사가들 주장처럼 동서양간 최초로 벌어진 전투에서 그리스 승리로 끝난 이 밀티아데스 양익포위전술은 이후 평원전투 교본으로 거듭난다. 


페르시아가 패한 이 전투를 두고 동양에 대한 서양의 승리라며 동양지배, 즉 서세동점의 당위성에 무게가 실린다. 어떤 역사가는 이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마라톤 전투는 유럽이라는 아기가 탄생하면서 낸 첫 외침이라고 감동한다. 고대에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동서양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 자체도 웃기는 일이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 문명이 유럽이 아니라 지중해, 즉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는 곳에서 일어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아테네보다 페르시아 문명이 더 발달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보다는 훨씬 민주적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노예계급이 해주는 밥을 먹고, 함께 군사훈련에 동참했으며, 기형이 태어나면 죽였고, 여자는 원로원에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예를 든 것은 문명의 반대가 야만이기 때문이다.


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쁨을 전하기 위해 전령이 전력질주해서 아테네에 도착한 후 “승리했노라!” 외치고는 쓰러져 죽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를 침략하는 것을 서둘러 돌아가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마라톤이 되고 훗날 올림픽 공식종목에 채택되었다. 이들이 달린 거리가 42km였다. 뒤에 195m가 추가된 것은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에서 영국 여왕이 있는 윈저궁까지 거리가 추가되면서 공식화된다. 여왕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선수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아테네는 마라톤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준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를 칭송하기 위해 파르테논신전을 세운다. 아테나신전이라 하지 않고 파르테논신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테나를 모시는 무녀들이 살았던 ‘처녀의 집’을 파르테논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에 시작된 이 대공사는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에 완공을 보지만, 1년 뒤 페르시아 3차 원정 때 허무하게 파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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