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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Aug 10. 2023

발칸의 약탈자들

까닭도 없이 신명에 고무된 채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유영하며 밤잠을 설치게 하던 영웅들이 있다. 책장에 침 묻혀가며 읽었던 신화의 현장, 영원한 고전 ‘일리아스’, ‘오디세이’를 비롯해 마구잡이로 입력했던 역사서들이 다투어 기억을 헤집었다. 서구 문명 발상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서양철학,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지중해 쪽빛 바다와 명경같은 하늘의 조화, 파랑과 하양의 대책 없는 유혹 산토리니, 그리스가 남긴 위대한 건축과 예술의 복합체로 칭송받는 아크로폴리스, 아드리아해 진주 두브로브니크, 달마티안 해변에서 아이매직으로 빠져들었던 팔등신 여인들, 물과 계곡이 만나 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자랑하는 세계자연유산 플리트비체, 독일 산악에서 발원해 흑해로 흐르며 뭇 역사를 삼키고도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의 빼어난 물길은 장구채 놀듯 현란한 세 치 혀도 침묵에 들게 한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을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궤도를 이탈하려는 용기 따위는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범부에게 거울 속 내 어린 시절 아버지를 발견하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관광은 점, 여행은 선, 답사는 면이라며 무지를 깨우치면서 관점이 변했다. 보이는 것에만 심취하진 않는, 삐딱한 소프트웨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큼 들어앉았다. 어찌 된 일인지 나이가 들면서 까칠한 성정에 굴복하는 일이 늘었다. 얼굴에 골이 깊어지면서 때를 놓친 삶에 위안이라도 삼고 싶었다. 진리의 부스러기라며 잡동사니 서책을 꾸역꾸역 집어삼킨 후유증이 이렇게 생겨났다.     


대자연 앞에서도, 역사가 남긴 예술품을 만나도 그랬다. 빼어난 멋과 오묘한 아름다움, 인간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힘든 위대한 작품 앞에서 감탄만하지 않았다. 형형색색 자연이 내려놓은 풍광 앞에서 하늘에 대고 칭송과 감사를 올리지도 않았다. 욕망의 잔재가 빛을 타고 굴절로 희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번영의 감미로움에 현혹되어, 단박에 넋을 빼앗을 만큼 장중한 멋을 지닌 건축물과 마주하면서도 하층민 피와 땀이 만들어낸, 오로지 견뎌야 했을 인간의 고뇌가 인정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자발적 전쟁의 노예가 되어 하루아침에 내몰려 저지른 악행은 인류 역사이래 끊이지 않았다. 위대하기 한량없는 신의 뜻이란 이름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전사의 투구를 씌운 뒤 살인을 정당화한 인류 파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인간에게 가슴에 빌붙거나 등짝에 매달린, 실체도 없는 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또 민족이란 이름을 빙자해 너도 죽고 나도 죽인다. 본적도 만져본 일도 없는 위대한 추상적 가치에 정신 줄 놓고 저지른 폭거의 역사를 찬양하는 선동을 경멸해야 하는 이유다.      




보스니아 전쟁 피해자 발굴 / 전쟁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여자와 노인과 어린어이들...


*

19세기, 서구 열강 식민지 침탈에 살아남기 위해 끼리끼리 뭉쳤던 부족이 위대하기 그지없는 ‘민족’이란 이름으로 탄생되었다. 강대국 경쟁 논리에 따라 뜻하지 않게 민족(NATION)이란 단어가 폭력의 토대에서 불쑥 태어났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강대국 경제논리 잣대는 역사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소수민족을 향한 무책임한 민족자결주의는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발칸반도를 비롯해 동유럽을 들끓게 했다. 이때부터 민족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뛰는 것을 맛본 피 끓는 단조로운 정의가 ‘외세배격’이란 출중한 사명감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종교와 역사가 다른 이들이 결합한 에너지가 모여 약탈, 강간, 살인, 인종청소가 뒤를 따랐다.    

  

발칸반도를 지배하는 자 더 넓은 세계를 지배할 충족요건을 갖춘다. 따라서 발칸반도는 동으로 서쪽으로 끊임없는 수백, 수천 번 외적 침략으로 전쟁에 시달린 반도이자, 지금도 수많은 민족이 뒤섞인 까닭이요, 전쟁이란 광풍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는, 끝끝내 꽃을 피우는 길가에 민들레처럼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한 민족의 땅이다. 폭력을 정당화한 정복자에겐 그만큼 매력적인 땅이자, 제국의 지배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반도, 우리네 한반도와 비슷한 슬픔을 지닌 터다.


한반도와 아픔의 형태가 닮은 발칸반도, 지구촌 유일 분단국가인 우리처럼 내일의 회오리와 폭풍우를 우려하는, 녹슨 역사가 아니라 폭력의 독기가 서려 있는 아슬아슬한 평화를 공유하는 땅이다. 고대, 중세,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알면 알수록 동병상련을 느끼게 된다. 어떤 얄궂은 운명이 발칸반도와 연결의 실을 잣고 있는 게 분명하다.       


발칸반도에 ‘세계의 화약고’란 수식어가 붙는다. 이곳에서, 이 아름다운 곳에서 일어났던 폭력은 비극적인 필연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한반도가 전쟁터였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발칸반도 사라예보에서 한 발의 총성으로 촉발된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연이은 한국전쟁, 월남전에서도 전쟁의 신은 식욕을 멈추지 않았다. 끝내는 발칸반도에서 인종청소로써 죽음의 축제를 벌여 20세기를 마감한 후 망각을 명약이라 던져주고 잠시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등을 내가 밀어서 떠났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전쟁의 파편을 담기 위해, 도무지 용서되지 않는 과거를 찾아, 그것들을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어 비록 허탈한 결과물이라도 내놓아야 마음이 편할 듯싶었다. 종반으로 치닫는 인생에서 끌어올린 용기치고는 제법 규모가 컸다. 한편 가슴이 고동치는 순간을 기대하며, 격변의 아픔을 어깨가 내려앉을 만큼 짊어지고, 새로움이란 생소함을 마음껏 탐하며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마중물을 쏟아 붓는 심정이었다.     


역사서를 비롯해 기행문 등 발칸반도와 관련된 책들이 시중에 많이 있다. 그러나 역사 입문서, 혹은 영웅을 들춰내 찬양 일색의 글과 선을 긋고 싶었다. 발칸반도 역사에서 인류 이래 행해진 미화되거나, 혹은 자유분방하게 읊조리는 폭력을 선명하게 들춰내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찰나의 쾌락을 위해 인간성에 쐐기를 박았던 역사를 향한 비판의 잣대는 얼마든지 들이대도 괜찮다고 다독였다. 평화의 토대를 파괴하면서도 과장되게 평화를 찬양하는 현재진행형을 역사에서 찾으려 함인 까닭이다.     

 

두 차례 여행이 끝났다. 연극이 끝난 후의 무대처럼 침묵에 들었다. 열광의 정점은 고요라곤 하지만, 가슴에 유럽사라는 거인이 쿵쿵 주먹질했다. 글을 써야 했다. 여행작가가 아니니 기행문도 아닐 터였다. 언감생심 역사서도 아닐 것이요, 이것저것 마구잡이식 잡문이 될 것은 빤한 이치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그곳에서 느낌, 다양한 자료와 책에서 읽었던 잡다한 지식, 그리고 온갖 정서가 뒤범벅된, 제어하기 힘든 감성을 버무려 우리와 닮은 이야기를 만들어보리라 생각했다.      


“콩과 조는 하늘이 내린 맛좋은 곡식이다. 그것을 쪄서 술을 만들어도, 끓여서 떡을 만들어도 맛이 있다. 또 범벅과 유밀, 엿을 만들어도 모두 맛이 있다. 이미 옛사람의 책이 잘 갖추어졌다고 하여 스스로 저술을 포기할 이유가 있겠는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하신 말이다. 전문가에 의해 잘 편집된 글들을 경험과 사상과 감성을 동원해 새롭게 편집해 세간에 선보이는 행위가 어떠면 똑 같은 재료를 새로운 방식 요리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일이다. 


나만의 레시피가 있다. 우리와는 색다른 문화를 순 한국식으로 접목하면서 광대한 인류 역사를 우리네 누정이나 대청, 그것도 사치일 양 하면 초가삼간 툇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하고자 한다. 





“악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것은 상처에 붕대를 감지 않아 계속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같다.”      

2015년 대학살 100주년을 맞아 아르메니아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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