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애재라! 내 엽전꾸러미!
내 아이들에게 학습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났다. 살다 보면 스스로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그에 대한 적응 또한 방법을 터득하였다. 가족여행 내내 냉랭한 분위기였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게의 치 않은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비록 법적 성인이 되었다곤 해도 내겐 여전히 어린 애다. 호들갑스레 호응하지도, 그렇다고 신경질도 내지 않는다. 어쩌면 스스로 감정을 감소하고, 단순하게 대응하기로 본능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장착한 듯하다. 자주 다투다 보니 딸아이는 그렇게 힘들게 살 거면 아예 갈라서라며 할 정도니, 내적 고독을 견뎌야만 하는 아이들은 무슨 죄인지 미안하기만 하다.
바다에서도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남매가 깔깔대며, 돌아다니길 재밌어한다. 어차피 어머니 아버지야 허구한 날 팽팽한 줄다리기 중이라 사이가 좋으면 좋지만, 아니더라도 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보였다. 일명 도가 튼 것이다. 부모로부터 튕기는 스파크를 흡수할 자력이 몸과 정신을 무디게 만들었을 법하다. 스스로가 아닌 반복된 일상에서 저들도 모르게 맷집이 튼실하게 자란 탓이리라.
그러나 세상의 주인공인 나는 달랐다. 여행을 빙자하였으나, 황량한 벌판을 지난 듯한 시간이었다. 나는 마치 수도자 같은 마음으로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진 애를 써야 했지만, 인성에 한계가 있어,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때마다 그동안 심도 있게 쌓아둔 사유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른 봄날, 마치 땅속 새 생명이 움트는 번잡함에도 대지 위의 메마르고 삭막한 풍경이 나를 장악하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팍팍하고 틈이 벌어진 관계라도 부부는 부부다. 동시에 상황에 따라 목적을 함께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폐해져 낡고 삭아 허물어지는 사이가 아니라면, 자라 꼬리만큼이라도 애증이 남아 있다면, 가정을 허물지 않음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그나마 소임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미래를 생각하고, 계획하고, 뜻을 분명하게 세우기 위해, 삶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은 혼자만의 능력과 의지와 결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농촌 사람이 도시의 오락에 유혹 당하듯, 문명이 발전될수록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은 전원의 정취를 그리워하기 마련. 10년 후를 내다보려면 1~2년 후의 삶에 리듬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기회가 찾아왔다. 때마침 처남이 자금이 달려 세를 주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해야 한다며 누나에게 타전해 왔다. 남에게 넘기기가 아까우니 저렴한 가격에 누나가 인수하라는 뜻이다. 처남이 큰누나와 이처럼 코드가 딱딱 맞아떨어지니, 누나 역시 스스로 하나뿐인 남동생을 돕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처남이 몇 년 후, 인근에 본인 소유의 건물로 귀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였다. 혼자가 아니라면 둘이 좋고, 다른 형제들까지 가까운 도시에서 삶의 터전을 닦고 있다면 충분히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위성도시, 조금 외진 오래된 아파트다. 그러나 다른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제법 넓은 평수다. 조금만 벗어나도 자연이 주는 질서와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또 저층 아파트라 재건축이 되어도 좋지만, 아니라도 내부를 새롭게 꾸며 노후를 자연에 가깝게, 혹은 경제적 논리에 부담가지지 않으면서 약간은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대도시를 고집할 이유가 하등 없었고, 올 연말에 전철이 연장되어 완공을 본다고 하니 필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철역과 걸어서 5분 거리면 말 그대로 초역세권이라고 하던가? 하긴 지금까지 활동반경에 진입하려면 한 시간 이상이 걸리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방향과 동선을 수정할 필요성도 느끼던 차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금전적인 문제로 절조를 잃어서 안 될 말이지만, 며칠을 갈등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처남이 다른 생각 들기 전에 재빨리 아파트 계약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고 했다. 이 말은 그 계약금 부담을 얼추 실업자로 평가받는 남편이 책임지라는 압력이었다. 지난번에 졸혼 비슷한 것 하자고 내 통장으로 보낸 돈으로 빨리 해결하라고 얼굴만 마주치면 압력이 들어왔다.
몇 달 전이었다. 나의 벌꿀오소리가 내게 보낸 돈을 되돌려 달라며 부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 어느 때 헤어지자고 알 수 없는, 변덕이 똥죽 끓는 나의 벌꿀오소리를 상대하면서 스스로 무장 해제할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멋진 스윙이었다.
계약금 문제는 일단은 피하고 봐야 했다. 그간에 심정에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고,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세상일이다. 또한 형제간이라 하여도 경제 논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빠른 판단이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들은 바도 없고, 아내를 통해서라, 처남을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다. 상황은 충분하게 이해되지만, 일단 내게서 빠져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변명거리를 찾으며 머뭇거리게 했다.
장고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악수(惡手)를 둘 수 없다. 꼼수도 이기면 정수(正手)다. 그러나 생각에 한계가 분명하였다. 세상이 인정하는 온건함보다 내 스타일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법하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짧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궁색한 버티기에는 간극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매달 꼬박꼬박 내는 곁집 살이 식 하숙비(?)를 볼모로 흥정해볼 필요가 있었다. 카톡으로 처남 통장번호가 찍힌 지 여러 날째다. 눈칫밥을 먹으며 며칠이 지났다. 잠시의 틈이라도 생기면 재촉하는 나의 벌꿀오소리가 쉬이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인생은 버티는 것이라, 그러나 마냥 버티기에는 맷집이 부족했다. 소심한 흥정의 판을 깔았다. 맥주를 앞에 놓고, 곁집 살림살이 경비를 가감해 달라고 애원하듯 말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턱도 없다. 그러나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 20에서 10%로 낮춰 감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명쾌하다.
“물가는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고, 세금은 그야말로 건국 이래 최고치로 급등하고 있다. 그런데 수입은 불변하고, 씀씀이가 구멍 뚫린 항아리다. 그런데 뭐라고? 이런 얌통머리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나가!”
뭐 대충 이런 대사다. 틀린 말 하나 없지만, 여전히 손해 본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마지막에 ‘나가’란 말이 화를 긁는다. 화풀이라도 해야 했다.
“아무리 무능한 정부라고 해도 물가는 잡아야 할 것 아녀? 규모의 경제 10위권에서 따따블, 아니 갑절로 떨어져도 뭐가 그리 당당한지? 하긴 우리 조국이 적화통일이 될까 밤잠을 설치는 28% 콘크리트 지지층을 굳게 믿는 거지 뭐! 띠!”
하며 엉뚱한 정치에 화풀이를 했다. 처음 밝히는 터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나는 회색분자다. 아니, 어쩌면 아나키스트를 이상향으로 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다다이즘으로 변해가는 듯하다. 이런 나를 어느 친구는 사내놈이 비겁하다고 한다. 비겁해도 어쩔 수 없다.
각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꿀오소리가 방으로 들어가면서 이런다.
하며 보냈다. 내 구렁이 알 같은 돈을 똑 떼어내서…….
손폰을 들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보내기를 툭 건드리는 순간 갈빗대가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를 들어야 했다.
시절이 한로(寒露)라 명월(明月) 따위 바라지도 않지만, 속살을 파고들어 뼈를 애는 소소리바람만 불지 않아도 그나마 버틸 수 있겠다. 오호라 애재라! 한 번 빠져나간 엽전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 대한·소한에 다시 찾을까 마고할미님과 더불어 포대화상께 기원 드리노라! 꽃피는 춘삼월에 콧노래 부르며 바다 건너 행락객 속에 끼일까 소원 드린다.
그날 밤 신 여사님(신사임당님 죄송합니다)께서 허공에 매가 되어 한 마리 닭으로 변한 나를 마구 후리는 망상에 휘둘리다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나의 벌꿀오소리 흔적이 없다. 집을 나갔다. 본능처럼 주방을 찾았다. 그러나 식탁에도, 가스레인지 위에도 아무 것도 없다. 밥솥 역시 메마른 상태다.
'너무 하시는 군요! 돈도 보냈는데...'
나는 오늘 하루 흥을 돋울 건더기를 찾을 수 없었다. 실로 슬프고 쓸쓸한 날이다. 햇살은 또 왜 이리도 좋냐?
라면 물이나 올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