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에서 여행으로 성격을 달리하면서 이곳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통일신라 후기 석탑으로 추정되는, 너무나 매력적인 낙산동 삼층석탑을 탑돌이 하면서 오랜만에 소원 하나 빌었다. 소원은 욕망의 충족을 위한 꿈꾸는 과정이다. 솔직하게 주조된 자유를 풍족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니, 추가로 하나 더 빌었다.
이처럼 간절한 남편과 아버지를 보고도 우리 집 식구들은 아무도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맑은 공기로 폐부 깊숙이 바람을 불어넣으며 심호흡도 하고, 더불어 단아한 석탑을 무심히 관조하거나, 지붕돌과 하늘의 경계선 네거티브한 선의 아름다움에 빠질 법 하지만, 벌꿀오소리는 물론 아들딸 역시 도무지 꼼짝하지 않는다.
오래전 기억이다. 국보 4호 여주 고달사지 부도탑을 감상하던 중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다. 넋 놓고 지붕돌에 처마에 양각된 가릉빈가와 시선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다.
“매번 봐도 똑 같은 돌인데 뭘 그리 넋을 놓고 쳐다보는데!”
차에서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나를 찾아 산 중턱까지 올라온 아내였다. 조수미 옥타브에 마치 책받침 쪼가리가 걸린 그 음성은 잊을 수 없다. 아들딸이야 그 유전자가 어딜 가지 않겠지만, 지리산 연곡사 입구에서 그랬고, 문화재의 보고(寶庫) 화엄사라고 다르지 않았다. 승탑 조각의 극치 연곡사 동부도를 코앞에 두고 차에서 대기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각설하고 석탑에 작별을 고하고 차로 돌아왔다. 대뜸 이렇게 묻는다.
“소원 빌었어요?”
“비밀입니다. 소원을 말하면 이뤄지지 않아요.” 했더니 뒤에 앉은 딸이 끼어든다.
“츳! 빤하지 뭐! 로또 당첨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결코 로또 따위, 그처럼 수준 낮은 소원을 빌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해줘야 했다.
“불가능한 소원은 분명하지.”
그러자 대뜸 벌꿀오소리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
“당신 구라 좀 치지 못하게 해 달라 빌지 그랬어요.”
나는 아들딸 앞에서 졸지에 구라쟁이가 되었다. 어이없다. 나는 거짓말은 물론 사실에 살을 보태는 것조차 싫어한다.
“나는 일평생 구라친 적이 없어요.” 했더니 딸아이가 거든다.
“군대에서 비행기에서 뛰어 내렸다면서.”
“…….”
엄마가 맞받는다.
“비행기가 아니라 나중에 헬리콥터라고 하더라. 그 뿐이 아니지. 특등 사수에다가, 물속으로 30리 잠수도 가뿐하게 통과하고, 요리도 일개 연대가 먹을 음식을 혼자 다 했고, 태권도 사단 대표로 나갔다는 것은 잊을 수도 없다.”
나는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다. 원래 남자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거품을 물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입을 다물어야 했다. 벌꿀오소리의 말이 이어졌다.
“결혼하기 전 아빠 집에 인사하러 갔는데, 버스에서 내려 걷다가 넓은 들판이 나오니 손가락으로 저기서 조기까지가 아빠 집 논이라고, 천 평도 넘는 논으로 사기를 쳐서…….”
이 말을 들은 아들과 딸아이가 킥킥거리며 배를 잡는다.
“엄마! 그래서, 그 넓은 논을 보고 아빠랑 결혼했나?”
이 말은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결혼을 위한 마지막 한 수는 뻥을 보태서라도 완벽하게 굳히기에 들어가야 했다. 우리 벌꿀오소리는 아마도 당시에는 백 퍼센트 믿었을 것이다.
나는 그 외에는 거짓말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군대 이야기는 아마도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 중에 나올 법하지만, 군에서 헬기를 탈 기회가 있긴 있었다. 부대 이동으로 이동될 현장 조감도를 그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대 고참병으로부터 옴진드기가 옮아 격리 당했던 터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단언컨대 특등 사수는 맞다. 부대 사격 측정이 나오면, 옷을 바꿔 입고 다른 병사 대신 쏠 만큼 신뢰를 받은 실력이다. 그리고 태권도는 군에 가면 다 검은 띠를 딸 수 있다. 대표선수라고 말한 적은 정말로 없다.
그러나 다양한 공격에 방어할 방법은 스스로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빠지는 것이 좋다. 눈을 감고, 우주의 일체(一切)를 깨닫는 부처의 지혜를 아는 듯 선정(禪定)에 든 모습으로 마음속 일렁이는 번뇌를 다스려야 했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루지 못할 꿈이다. 바닥 모를 고뇌가 지루에 빠진다. 딸아이가 날 깨운다.
“아빠 삐쳤어요? 삐쳤네! 흐….”
그럭저럭 동해를 낀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딸아이가 갑자기 소변이 급하다며 몸을 옴짝대다가 결국엔 몸을 뒤튼다. 이미 휴게소는 다 지난 터라 달리 방법이 없다. 급한 나머지 초면인 면 소재지에 들어섰다. 멀리서 보니 김밥집 간판이 보였다. 김밥 몇 줄 포장하면서 그 틈에 화장실을 사용하면 되겠다며 식당에 도착했다. 그런데 간판이 요술을 부렸다. 김밥이 아니라 ‘집밥’이라고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목적지에서 맛난 붉은 게와 활어 회를 먹기로 한 계획을 수정해 집밥으로 해결했다. 그런데 진정한 집밥의 맛집이었다. 어쩜 네 명 모두가 집밥을 김밥으로 읽을 수 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다. 급한 나머지 읽고 싶은 데로 읽어버렸으리라.
그럭저럭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래도 바닷가에 온 이상 게와 활어회는 맛을 보아야 한다. 늦은 저녁을 생각하고 단골 점포에 들려 홍게를 사고, 서비스로 소라까지 얻었다. 주인아주머니가 후덕하게 생겼다. 그동안 면을 튼 아내가 몇 살이냐고, 언니처럼 보인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렇게 오락가락 하더니 동갑이라며 서로 좋아한다. 나는 안다. 홍게를 더 헐값에 사려는 벌꿀오소리의 작전이란 사실을….
그 아주머니 붙임성이 찰떡이다. 글쎄 날 보고 대번에 ‘오라버니’라고 부른다. 덕분에 가격 흥정에서 에누리란 없었다. 대신 다리 몇 가락 떨어진 홍게 두 마리 더 얻었다. 그리고 딸이 거들며 마지막 유효타를 날린다.
“이모, 다음에 또 올게요.”
이런 10만 원 싸구려 관계라니! 나는 닭살이 돋지만, 벌꿀오소리는 굳은살이고, 딸아이는 돼지껍질이다. 아들이야 뭐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으니 역시, 내 사색의 유전자를 조금이라도 전해진 듯하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두지 알 수 없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나 좋은 일도 필요 없다. 다만 지금보다 나쁜 사건만 없으면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봄 햇살이 선사하는 공평함에 감사하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홍게를 싣고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매사 이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벌꿀오소리가 뭔가 미심쩍은 듯 질문을 한다.
“OO수산 아주머니가 예뻐요?”
“무슨 생콩 씹는 소릴…?”
“오라버니라고 하니 좋아 죽던데.”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주머니를 나와 연관 짓다니? 어이가 없다.
“이 사람이 지금 날 뭐로 보고.”
“명함 받았잖아요.”
“아, 그럼 주는 데 버려요? 그리고 다음에 올 때 홍게 미리 주문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지 뭘.”
"하긴 여자라면 정신이 번쩍들지."
이때 아들이 거든다.
“여행 와서도 시작하려고요?”
아무 일도 아닌척 하며 맛있게 먹으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은 도마질 소리가 점령하고, 바람을 들이기 위해 숙소 베란다에서 올려다본 갈고리달이 가슴에 걸리는 듯하다. 정말 이제는 은둔의 시기가 찾아온 것도 같다는 생각이 파도 소리를 타고 밀려들었다. 가슴에 칠흑이 엄습하고 망령된 종교라도 빌붙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다. 한편 나의 벌꿀오소리가 날 사랑하긴 하는가 보다. 질투가 분명하니까 말이다. 아니면, 그냥 본능이 시키는데로 회까닥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심정이 궁금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평정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즐거운 오산일 수 있지만, 그녀 역시 질풍노도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라 확신하였다. 어차피 앞에서 시비 거는 장애물을 치우는 게 우리네 삶이라면 인생에 충실하자.
역시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었다. 그때 들판으로 사기만 치지 않았으면, 이따위로 고통받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허무의 찬바람이 엄습했지만 그동안 무턱대고 살아온 나였다. 혹 내 안에 빛이 있다면 스스로 빛날 것이니, 중요한 것은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빛의 존재 유무를 떠나 긍정의 믿음이 중요하니까 노력은 해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