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준비 2

by 박필우입니다



어디선가 목돈이 생긴 듯했다. 학교 마치면 중간에 놀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오라는 어머니 엄명이 아침밥 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떨어졌다.


"왜, 오늘 무슨 일 있나?"

"왕겨 스무 가마니랑 연탄 오백 장 들여놔야 한다."

"그거 엄마하고 나하고 둘이서 다 하나?"

"그러면 누구 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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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직장에 출근해야 했고, 형은 지금 집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버릇처럼 물어본 말이었다. 물론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섬섬옥수의 아버지는 집에 비가 새더라도 손가락 한 번 까닥하지 않는 분이었고, 응당 범치 못하는 존재였다.


즐거워야 할 토요일 아침이 어두운 공간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책가방을 자전거 뒤에 싣고 학교로 향하는 아침 바람이 더 차게 느껴졌다. 수업 받는 중에도 오후에 힘들어할 일이 생각나 마음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그래도 어머니의 엄명은 거역할 수 없었다. 집에 절박한 사연이 있음을 알기에 빨리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집으로 갔다.


어떻게 마련한 목돈인지 몰라도 한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후다닥 끝내 놓아야 한다는 다급함이 있었다. 마냥 미적거리며 들고 있다간 어디에 쓴 지도 모르게 흔적 없이 흩어지고 마는 구멍 뚫린 생활고였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준비를 끝내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토요일 오후 내내 연탄 오백 장, 왕겨 열 가마니를 창고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연탄은 오십 장씩 리어카에 실어 앞에서 어머니가 끌고 내가 뒤에서 밀어 집 아래 계단 아래까지 가져다 놓은 뒤 그곳에서부터 집까지 지게에 지고 여러 번을 날랐다. 연약했지만 처한 삶에 안간힘을 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연탄 한 장에 얼마간의 배달료가 붙어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생각에서였다.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잠시 틈을 두고 도정공장으로 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리는 먼지 속에서 쌀겨를 차곡차곡 가마니에 담아 리어카에 실어 날랐다. 내 머리와 얼굴엔 온통 검은 연탄과 뿌연 쌀겨의 먼지가 섞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쿤타킨테가 따로 없었다.


피곤한 몸과 달리 마음은 무척 푸근했다. 이미 지난주에 각 방 문살에 꽃잎 붙여 한지 새롭게 바르는 일을 끝냈으니, 난방 연료와 함께 한겨울을 따스하게 날 채비가 끝난 것이다. 어머니는 정지 부뚜막에 걸린 커다란 가마솥에 그동안 아끼던 마른 장작을 지펴 물을 끓였다. 끓는 물 몇 바가지 부어다 빨간 고무로 된 간이 목간통에 붓고 찬물을 섞어 따뜻하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그 속에 쪼그려 몸을 담갔다. 비록 물은 가슴팍에 찼지만, 온몸의 세포가 자글자글해지는 느낌에 하루의 피곤이 풀리는 아늑함을 맛보았다. 아궁이에선 마지막 남은 장작불이 힘을 다하고 있었다.


밖에서 끝내길 기다리던 어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옷에 묻은 먼지 탁탁 털어내고 대청마루와 연결된 쪽마루까지 물걸레질이 한창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미치자 대충 땟국물만 벗겨 내고 쪽문을 통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에 뽀송뽀송하게 마른 속옷으로 갈아입고 따끈한 아랫목에 엎드려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단잠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직한 어머니 말소리에 눈을 떠보니 밖은 이미 어둠이 먹어버렸다. 어느새 저녁준비가 끝이 난 듯했다. 내 볼을 쓰다듬으며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거친 손바닥 감촉은 평생을 기억해도 좋을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내가 잠에서 깨는 기척을 보이자 조용히 나를 불렀다.


“일어나서 저녁 먹자. 아버지도 사랑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설거지를 끝낸 누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뒤란을 통해 동네 친구들이 모여 노는 곳으로 달아난 후였다. 사랑에선 가끔 아버지 글 읽는 소리가 평화로운 음악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초저녁에 한숨 자 두었던 터라 따뜻한 방바닥에 아랫배 깔고 책장만 펼친 채 하릴없이 심심해하고 있었다. 그때 바느질에 열중이던 어머니의 가늘고 긴 한숨 소리가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마치 삭아 내린 세월을 토하는 듯했다.



가을 일러스트(참 오래된 그림) 요놈이 보고 싶은데 시카고로 시집 보냈다


“밥 잘 먹고 따신 데 앉아서 한숨은 그리 쉬는데?”


다소 퉁명스러운 아들놈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어머니 눈에는 금방이라도 촉촉한 물방울이 맺힐 것만 같았다. 집을 뛰쳐나가 도시의 하이에나가 된 큰형의 생각이 파편처럼 떠돌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와 박혔기 때문이었다.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 타향에서 방황하고 있을 자식 놈의 걱정에 당신만 따뜻한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아픔으로 내려앉았던 것이다.





입이 바싹 말라왔다. 장독대에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식혜가 생각났다. 방안의 먹먹한 기운을 뒤로한 채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귓불을 스치는 저녁 공기가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달빛을 빌어 독들이 옹기종기 놓인 장독대로 갔다. 식혜가 든 독을 찾아 커다란 양재기에 퍼 담고 벌컥벌컥 마시며 방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채 바느질에 열중인 어머니께 불쑥 내밀었다.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어머니는 입맛을 다시며 달게 받아 마신다. 어머니는 삶의 힘겨움을 토하고 나자 그동안 꽉 막혀있었던 가슴이 횡 하게 비어 있었던 것이다. 늦은 가을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다음날, 어머니와 함께 시장 난전으로 가 솎아낸 무청과 배추 겉잎들 한 수레 실어와 새끼줄에 굴비처럼 엮어 굴뚝 옆 흙벽에 걸어 놓았다. 시래기 된장국, 시래기 무침, 시래기 고등어조림, 시래기 멸치볶음 등등 겨우내 반찬거리였다. 이로써 한겨울을 날 채비는 대충 끝이 났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햇살이 비슷하게 비추자 시래기는 간지럼을 탄 듯 몸을 틀며 걸려있었다. 어머니의 휘어진 허리춤은 시래기가 되었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집 나간 큰형이 돌아와야만 우리 집 월동준비는 완전히 끝난다.




며칠 전 처가에서 삶은 무청 시래기를 한 보따리 보내왔다. 아내는 요즘 어디 둘 곳도 마땅찮은데 이렇게 많이 주면 어떻게 하냐며 볼멘소리로 냉동실과 김치냉장고에 나누어 넣는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겨 보았다. 이제는 월동준비란 말 자체가 없어진 사회가 되어 버렸다. 모질게도 가난했던 그때와 비교하면, 어지간한 풍요에도 마음은 왜 이렇게 허전하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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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2023 대구예술지원금에 선정되어 올 12월 초에 낼 책 원고 중 맛보기입니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비틀거리는 중입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ppw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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