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란 게 참

도도리표 인생

by 박필우입니다


우연히, 아주 우연하게 지나가다 들렸다.

식당 할머니 왈!


“아따, 우에 알고 왔노?”


그러고 보니 식당 안이 쾡 하게 비었다. 잉잉 거리며 칭얼대던 냉장고도, 매번 TV조선만 틀어놓는 이따만 한 텔레비전도 없다.


“분위기 와이라요?” 했더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란다.

칠성시장에서 문구점과 옷 장사 20여년, 남문시장에서 식당 30여년, 그 삶이 이제 끝이라며 좋아한다. 그런데 왜 슬퍼 보일까?


연초에 김치 맛있다고 했더니 잘 익은 김치까지 공짜로 준 그 할머니다. 간혹 지나가다 인사하면 맥주 한 병 마시고 가라고 잡아끌어 공짜 술도 많이 마셨다. 너그 마누라 가져다주라며 국산 참기름 한 병과 깻잎 장아찌를 덤으로 얻어 챙기는 일도 있었다. 내가 특별히 잘한 것도 없다. 돌아서 생각해도 술 취하면 앞에 앉아 깐족대며 할머니 약이나 올린 것뿐인데 말이다. 그것도 대화였을까? 하긴 말꼬리 잡기 게임이 시간 보내는 것 중 가장 어울릴 수도 있겠다.


마음이 쌍글해져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띠 동갑 먹보동생 불러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 먹었다. 갈치구이와 달걀 프라이 네 개, 소주 두 병을 비우자 할머니가 하는 말.

“니는 폭탄주 안 마시나?”

그래서 또 마셔야 했다. 할머니 마지막손님 권리(?)로 말이다.


Acut.서원목은행나무.jpg 이제 가을이다. 좋아하는 은행잎도 샛노랗게 물들겠지... 그 때면 나는 행복할까? 현풍 도동서원 은행나무(사진 송은석)



마지막손님? 그래서 된장찌개를 세상에 더없이 짜게 만들었구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짠맛이었다. 아무래도 할머니 눈물까지 더해진 것 같다.


“할매 낼부터 뭐할라꼬?” 했다.

“문디! 놀지 뭐하기는……” 하는데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지.


계산을 하려니 그냥 가란다. 지금까지 와준 것만 해도 고맙기 짝이 없는데 마지막 날까지 돈을 받는 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한사코 손사래다. 나도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동안 이곳저곳 기웃대다 들어가면 환하게 맞아주며 이것저것 챙겨주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베풀어준 것만 해도 감사한데 마지막 날 공짜로 먹으면 재수 없다고 억지 부리며 오만 원 권 한 장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할머니도 지지 않았다.


“문디, 끝까지 똥고집이네” 하며 재차 끄집어 내 손에 꼭 쥐어준다. 더는 거부할 수 없었다.


나오기 전 안아보았다. 꼭 안기는 몸이 우리 큰누님 같다. 콧등이 시큰해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뒤에서 이런다.


“몸 챙기라! 아프믄 니 손해다이!!! 술 고마 처먹고.”

허리가 기억자로 굽어서 고개만 들고 말하는 거 다 안다. 속으로 그랬다.


‘내 걱정 말고 할매나 건강하소.’


시장 과일가게 앞을 지나는데 하우스밀감이 눈에 띈다. 한 상자 덜렁 사서 재차 가게를 찾았다. 휑하게 빈 가게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다. 그런데 눈이 초점 잃은 흐릿한 표정이다. 자세히 보니 눈가가 그렁그렁 하다. 내가 나간 뒤 회한의 감정이 할머니 가슴을 기습했던 것 같다. 살아온 나날들이 미련도 후회도 없지만, 자식과 남편 뒷바라지에 속절없이 세월을 보낸 과거가 빛바랜 파노라마가 되어 펼쳐지지 않았을까.


“뭐 하러 또 왔노?” 하며 얼굴을 돌려 눈가를 훔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들고 간 밀감 상자만 의자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저 문디는 왜 자꾸 왔다갔다 하노. 이거 뭐고?”

“할매 선물!”

“지랄! 지나 처먹지.”

참 욕도 마지막까지 차지게 한다.



초자연적인 인연의 끈, 쓰린 세상이라고 해도, 우연과 인연은 어떻게든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게 마련이다. 한 곳에 인연이 끝나면 또 다른 어디에선가 운명처럼 인연의 실을 잣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우연을 빙자한 필연이 세상의 박동을 건강하게 하고, 따뜻하게 하는 까닭이리라. 어디선가 읽었다. 낯선 사람을 냉대하지 말라. 그가 천사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황혼에 물든 나뭇가지가 아름다운 이유도, 인생이란 그렇게 가고 또 오고 가고 하는 것도, 그리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없는 무덤덤한 삶이 행복인줄 할머니가 알려 주었다.




집에 돌아와도 짠 맛이 해갈되지 않는다. 맥주 캔을 하나 딴다. 생각건대 내 인생은 늘 도도리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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