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준비 1

첫 번째 이야기

by 박필우입니다

이 글은 안단테로 읽어 주세요^^*..




어릴 적 우리 집 월동준비는 문살에 한지 바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그다음이 장판 콩기름 먹여 새로 만들어 바르고, 김장이 끝나면 연탄 500여 장 채워놓고, 장작 모아 뒤란에 차곡차곡 쌓고, 무청, 배추 시래기 굴비처럼 엮어 굴뚝 옆에 걸어놓으면 준비가 끝난다. 간혹 방구들을 들어내고 수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삼 년에 한 번쯤이라 기억한다.


늦은 가을날 토요일이었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배고픔을 참으며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왔더니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교복도 벗기 전에 부른다.


“아이고, 너 마침 잘 왔다! 안방, 사랑방 문짝 좀 뜯어내 온나. 더럽혀진 한지 뜯어내고 깨끗이 물걸레질해서 닦아 놔라.”


그동안 혼자서 힘에 부쳤는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내게 도움을 청했다.


“배고프다. 점심이나 채려 도고!”


귀찮기도 하거니와 배고픔을 참지 못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머니는 하던 일 끝내면 내가 좋아하는 콩가루 넣고 칼국수 밀어서 삶아 준다며 조금만 참으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절집의 금상역사상처럼 인상을 구겨가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호했다. 처음에는 달래는 듯했지만, 결국 눈을 부라리며 매 맞을 준비 하라는 말에 쉽게 이기긴 틀렸구나 싶었다. 그나마도 내가 도와야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끝날 일이었다. 순종의 아름다움은 아들을 더욱 대견하게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가 보다. 입은 삐죽거렸지만, 배고픔을 참아가며 고분고분 어머니를 도왔다.


방이 무려 넷이다 보니 방마다 문이 두 개씩이면 여덟 개, 안방엔 하나 더 있으니 모두 아홉 개의 방문에 한지를 바르는 일도 여간 수고스러운 게 아니었다. 일 년간 바람을 막고 온기를 가두던 문이었다. 문짝에 때가 꼬질꼬질한 기존에 발린 한지 뜯어내고 깨끗한 물걸레로 눌어붙은 먼지를 닦아냈다. 어머니가 쑨 밀가루 풀을 문살에 바르고, 어머니 속 고쟁이 같은 뽀얀 한지를 입혔다. 그리고 문고리 옆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투명 유리로 창을 냈다. 채광과 함께 밖의 기척을 문을 열지 않고서도 확인하는 역할이었다. 문이란 고정된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유리가 일 년간 온전하게 제자리에 있으려면 유리창 주위를 겹으로 덧대어 한지를 몇 차례 발라야 한다.


그리고 유리창 주위에 국화잎이나, 코스모스, 샐비어 꽃잎 몇 개 따서 누님들 자수 놓듯 정성스레 올려놓는다. 이때 내 책갈피 속에 잠들어 있던 능금나무 꽃잎도 세상에 빛을 본다. 이 작업이 여간 정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번 잘못해 놓으면 한겨울 지날 때까지 식구들에게 두고두고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재주를 발휘했다. 사방팔방무늬,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화분에 핀 화초 등 요리조리 크기랑 색깔에 맞춰 붙인 후, 그 위에 적당한 크기의 한지를 오려 한 꺼풀 더 입혔다. 활짝 드러난 밝은 빛이 아니라, 반투명유리 너머인 양 은은히 빛나는 오묘한 느낌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작은 유리창 부분은 직선으로 말끔하게 오려내 닦고 문짝 사방에 바람막이 문풍지까지 발라야 끝이 난다. 그런 후 햇살이 잘 드는 담장에 기대놓으면 백설기같이 하얀 문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았다.


어머니 칼국수 만드는 동안 뒷설거지는 나의 몫이었다. 마당에 흩어진 문풍지 쓸어 모아 부엌 아궁이에 넣고,

대청도 물걸레질로 반질반질 윤기가 나도록 닦았다.


가을 오후의 햇살이 청량했다. 어머니가 급하게 만들어 준 푸성귀 가득 넣은 칼국수 두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난 뒤, 문짝 떨어져 나간 휑한 방안에서 솜이불 둘둘 말아 낮잠을 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귓전에 어머니 말씀이 들렸다.


“야는 한숨 자고 나면 쑥쑥 크는 소리가 들린데이!”


체, 거짓말도….

어머니 말에 대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신발 구겨서 끌며 늘어놓은 문짝에 가보면 하얀 속옷 같은 문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더구나 정성스레 붙여놓은 꽃잎들이 말라붙어 화사한 색상을 제대로 내고 있다. 손가락으로 툭툭 치니 탱탱! 소리가 울렸다. 때마침 출타했던 아버지가 돌아오시며 사랑방 앞 문짝 가져오란다. 낑낑대며 들고 들어가 애써 방바닥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 부리나케 도망치려고 하자 이내 아버지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먹 갈아라!”


아버지는 하얗게 한지 발린 문앞에 앉아 옆에 놓인 붓들을 만지작만지작 고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먹 가는 것부터가 글의 시작이라고 했다.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아 손목에 힘을 풀고, 새의 힘으로 먹을 쥐고 한 방향으로 정성스럽게 갈아야 한다고 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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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오는 기침까지 참아가며 먹을 갈아야 했다. 먹물은 시간이 만드는 것이었다. 벼루 귀퉁이 먹물에 방울이 맺힐 때쯤이면 농도가 적당 하다는 신호다.


먹빛 나는 먹물에 붓을 돌려 적신 후, 문 위쪽 귀퉁이에 난蘭을 치는 아버지의 경이로운 모습이란…. 첫 시작점, 섬섬옥수의 아버지 손이 그토록 파르르 떨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거침이 없었다. 마지막엔 생전 보도 못 한 회색 꽃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새해 희망처럼 하얀 한지 은은하게 비치는 꽃잎과 더불어 살아있는 난蘭이 사랑방 문짝에 붙어 일 년 겨울을 날 준비를 그렇게 마쳤다.


(2006)



2023 대구예술지원금에 선정되어 올 12월 초에 낼 책 원고 중 맛보기입니다^^*.. 내발에 내가 걸려 비틀거리는 중입니다. 응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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