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3

합스부르크왕가는 합죽이

by 박필우입니다



성공이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이카로스 패르독스(Icarus Paradox)란 말이 있다. 그러나 희대의 풍운아 카를 5세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글쎄다.


카를 5세는 프랑스와의 전쟁, 또 골수 가톨릭국가와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두 제국의 황제인 터라 강적 이슬람제국의 성전을 막아야 했고,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불길처럼 번진 개신교와 종교전쟁이 일어나며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또한 이모부 헨리 8세가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도 한판 대결이 불가피했다. 지배지가 광대한 제국이 그랬듯 내부 불만이 증폭된 폭동과 변방의 반란도 그를 괴롭혔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는 황금도 바닥을 드러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석양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 제국은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다. 특히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역으로 예수회를 만들어 가톨릭을 더 옥죄는 반개혁을 단행하면서 원론적 신앙에 깊게 파고들어 개신교 전파에 대항하는 수단을 병행했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매형이다. 카를이 어린 시절 폴로 경기를 함께한 친구였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로마교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카를 5세의 가톨릭 교권이 강성해지자 이를 우려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카를 5세가 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는 옛날부터 있었다. 카를은 그를 지원하는 자들의 부富를 마음껏 활용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금융가 큰손들과 고모 마르가레테의 힘을 이용해 선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카를 5세는 1520년 10월 22일, 그들의 지원을 받아 도이칠란트 황제 카를 5세로 아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마친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았다. 누나의 남편을 차마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적 프랑스를 도와준 로마는 그냥 둘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불만이 가득했던 3만 명의 가톨릭 군사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격렬한 기세로 로마로 진격했다. 스위스 교황 근위대 5천 명이 하늘을 믿고 목숨을 건 방어에 임했으나 전멸하다시피 했다.

프랑수아 1세


일부 근위병만이 교황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톨릭 점령군은 3일간 로마를 약탈했다. 굶주린 광기의 바다처럼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 금은보화를 찾아 탈탈 털면서 여자들은 강간하고, 건물은 부수고 불태웠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간에 의해 가톨릭의 정신적 정점의 로마가 폐허가 되는, 가톨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악을 행함으로써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파탄에 빠지면서 새로운 질서로 회복하는 이러한 순환은, 인간에게 도덕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한다. 영혼의 부작용으로 태어나는 ‘악으로부터의 도덕’이다.


로마가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수아 1세와 잉글랜드 헨리 8세가 힘을 합쳐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도이칠란트 제후들은 오스만제국의 위협에 맞서 신‧구교 갈등을 봉합하려 애썼다. 하지만 카를 5세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튀니지를 함락하고 서부 지중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이슬람이 서구 유럽으로의 진출을 차단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 '모나리자'

프랑수아 1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선 역부족임을 실감해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두 앙숙 간의 오랜 갈등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감수성이 남달랐던 프랑수아 1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찬사를 받는다. 그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세상에 선보이게 했고, 돈을 들여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모아 지금의 프랑스 루브르 재산으로 등극시킨, 문예부흥에 적극 동참한 왕으로 찬사가 따른다.


한편 제국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카를 5세는 유럽을 호령하는 전대미문의 제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한 두 제국의 황제답게 종교개혁의 물살을 타는 개신교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하면서 이에 맞서는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의 선봉에 카를 5세가 있었다. 하지만 농민반란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제국의 에너지는 소진되고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오랜 전쟁에 애국자 없다. 결국 1555년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휴전을 맺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해’로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면서 타협했다.


카를 5세, 매부리코에 길쭉한 턱과 아래턱이 튀어나온 합죽이인 까닭에 사람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입을 온전히 다물 수 없어 파리가 입속으로 들락거리자 콧수염을 길러야 했고, 턱으로 인해 늘 침을 흘려 소화기에 문제가 많았으며, 말년엔 통풍마저 찾아왔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제국의 권한은 물려받은 행운의 사나이는 40여년을 전쟁으로 하루를 났다. 하나 그도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회의가 일었고, 결국 지천명을 넘기고 56세가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한 여생을 택한다.


아들 펠리페 2세(당시 식민지 필리핀은 펠리페에서 붙인 이름이다)에게 플랑드르 부르군트 공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식민지 통치권을 넘기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를 넘겨준다. 그리고 2년 뒤 억세게 운이 좋은 카를 5세도 인간인지라 1558년 9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생을 마감한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끊임없이 진출을 노리는 오스만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치열하게 전쟁을 해야 했다. 헝가리로 진군하는 오스만제국군을 맞아 패하면서 도나우강 동쪽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 과정에 도이칠란트 신교 선제후 권력들과 타협해 이슬람을 방어하기 위해 그들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했으며, 느슨한 종교정책을 펼쳐 오스트리아를 온전하게 가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중부유럽의 기독교세계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역에 그들의 정통 가톨릭을 굳건하게 뿌리내림으로써 훗날 폭력의 씨를 남겨놓았다. 사실 슬로베니아 역시 신교의 바람이 몰아쳤지만,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재제에 부딪혀 가톨릭으로 되돌리는 역기능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 다음편에는 '종교개혁과 부르주아'애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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