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드로 대성당
“회개하고 회개하라! 누구나 회개하고자 기부금만 내면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도다. 이곳 상자 속에 돈이 들어가는 순간에 들리는 ‘짤랑!’ 이 소리는 지옥의 불길에서 영혼이 솟아나게 하는 힘이도다!”
교황 레오 10세가 산피에트로대성당(성베드로대성당)을 건축하는 데 든 빚을 갚지 못하자 면죄부를 팔면서 부르짖는 소리다. 당시 성당의 사제들은 오랜 종교 권력에 취해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교회를 운영하면서 공허한 교리의 외침은 현실을 벗어나고, 하느님의 중재자로서 내세관의 선도자로 자처하면서 기득권에만 정신이 팔려 세태를 바로 읽지 못했다.
때마침 인쇄술의 발달과 동방으로부터 제지술이 이입되면서 성서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경의 교리를 독점하던 성직자들의 엇나가고 왜곡된 해석은, 일반인들에게도 성경이 읽히면서 지금까지 편견과 오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교황이나 주교, 그리고 어떤 사람일지라도 기독교인이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한 마디도 강요할 수 없다.”-루터
역사에 있어 가톨릭의 기득권 지배담론은 은밀하게 때론 격동적으로 강화되면서 확산일로를 걸어왔다. 그러나 세상이 발전하면 민심도 눈을 뜨게 된다. 이때 세계사에 짠! 하고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의견서〉를 내걸었다. 일종의 대자보인 이 글은 상상 이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거대기득권 질서와 맞서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승리의 약자’였다.
이 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마침내 루터의 대자보가 인쇄되어 15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16세기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인쇄 혁명이라 일컫는 인쇄술의 혁신적 기술이 뒷받침되면서 순식간에 독일 국경을 넘어 유럽 전체로 불길처럼 번져갔다. 로마가톨릭의 부패와 폐단에 맞춰 인쇄술의 발전으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국경이란 의미가 없었다.
교회의 폐단을 잘 알고도 감히 큰소리는커녕, 쓴소리 한 번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마음이 ‘훅!’ 하고 빨려들었다. 그는 하느님과 시민 사이에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배제되고, 단지 기도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혁신적인 종교 교리를 설파함으로써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신라 말, 기울어가는 나라에 한몫을 담당했던 불교 화엄종이나, 교종에 반해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문자란 깨달음의 방편과 수단일 뿐, 진리의 깨달음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서 본성을 보아야 한다며, 이로써 누구나 부처에 이를 수 있다는 ‘선종禪宗’의 가르침과 얼추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루터는 인간은 오직 기도와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며, 기존 성직자들을 향해 도덕적 타락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교회는 지상의 질서와 하느님 사이에 있고, 그런 까닭에 사제는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기존 가톨릭 성직자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루터는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사제란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할 때 구원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쳐졌던 장막이 거둬졌다는 뜻이다. 이로써 누구든지 사제나, 신부,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지금까지 독점했던 신의 대리인을 빙자한 성직자의 행태를 지적하고 나섰다.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약하자면 또 하나의 인간 해방인 셈이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 입장에서 보는 집과 밥그릇마저 빼앗아가는 당치 않는 소리다.
루터가 기존 가톨릭의 보수적인 질서에 대항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자연의 현상을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면서 가능했다. 승자독식 구조에 순응하며 뻔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살아가고 싶은 변화의 욕구가 작용했다. 그렇다면 실제든 허구든 시공간의 내러티브narrative를 간과할 수 없었고, 스스로 스토리텔링 하면서 이뤄낸 종교적 인간해방이었다.
고향을 향하던 루터 발아래 벼락이 떨어졌다. 루터는 공포에 떨면서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이 기도에 의해 살아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루터는 이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정말로 수도사가 된다. 당시 기득권층의 협박을 극복하며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때 다진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종교개혁에 앞장선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노력도 있었다. 루터와 동시대 비슷한 시기에 종교개혁사상을 부르짖으며 기존 교회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내세보다 현세의 실생활 존재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주님만 외치며 아담의 원죄를 대신해 울며 흐느끼는 것이 다가 아닌, 프로테스탄티즘, 즉 대중적인 복음주의의 가치를 강조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지하세계를 약탈해 하와와 아담을 구해온 것으로 원죄에서 벗어난다는, 예컨대 수도원 골방에 박혀 금욕적 생활도 좋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삶에서 하느님을 위한 성찰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마치 불교에서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림으로 설명한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 입전수수入廛垂手와도 같은 현실세계로 나아가 함께 나누란 뜻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들의 하느님은 창조주인 까닭에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도, 즐겁게 지저귀는 새소리도, 감미로운 음악도, 맑은 공기와 청정한 하늘도, 건강한 육체도, 사랑도, 눈물도, 애증도, 슬픔마저도, 세상 그 어느 것도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다. 세속의 삶에서 부대끼며 나누고, 또 깨달아가며 나의 본성을 찾아 하느님과의 교감을 통한 진정한 종교적 삶이란 이러이러하다며 설파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자연을 마음껏 누리는 삶도 권리라고 주장했다.
칼뱅은 더 나아가 일상적 삶 속에 정치와 경제도 신앙을 접목할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칼뱅주의는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근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뱅이 주장했던 ‘예정설’은 하느님 나라에 갈 사람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부富란, 성실한 삶에서 자연히 따라오는 후속적인 것, 자신을 위해 부를 사용하지 않으며, 사회와 교회를 위해 축적한다. 고로 신의 영광을 위해, 신이 내린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사업을 하고 또 번다. 단 한 푼의 재산이라도 결단코 자신의 안위와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상적 가치를 찾아 눈을 돌렸다. 부가 쌓여갈수록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명서가 되고, 부지런한 삶이 동반된 자신의 가치를 하늘에 드러내는 일종의 종교의식에 의한 사업추진이었다. 사업의 성공은 하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가 부와 도덕 간의 대립을 부정하면서 부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준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부자가 된다는 것은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파이를 늘려서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부자가 사회에 가장 쓸모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란 의미다.
이러한 종교적 생활관은 이윤추구의 자본주의 경제사회에 활력을 제공하는 등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당연히 잉여재산은 사업에 투자하며, 그것을 굴려 부풀려지면 투자를 거듭했다. 이로써 기업이 비대해지고, 중산층 권력의 부르주아가 나타났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초심은 사라지고 부의 권력화 세습화에 목숨을 걸면서 남에게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이렇게 생겨났다.
종교개혁의 불길은 독일지역 제후들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졌다. 군사와 경제력 등 성장한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의 영향 아래 세금을 바치는 데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이들은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들 제후는 루터를 보듬어 보호하기에 이른다. 기세를 몰아 루터는 《독일의 귀족들에게 고함》이라는 서간문의 책을 발간한다. 게르만의 귀족과 왕권 보호를 확립고자 하는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종교개혁의 성공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그가 혁명적인 교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사상을 당대의 역사적 사회사적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종교에 관한한 개개인의 독립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근대주의의 영향이었다. 그러면서 서유럽사회는 독립된 교회들이 꾸준하게 나타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단순하게 비교한다면 신과 인간 사이에 그 어떤 대리자도 존재하지 않은 동방정교와 매우 비슷하다.
결핵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칼뱅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