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음식남녀飮食男女(식욕과 성욕)’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 욕구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성으로 제어하기 어려웠던 원초적인 본능을 수유를 하면서 느꼈다. 불교의 6욕에도 없는 욕구이다.
나는 젖배를 곯았다. 엄마는 기본적으로 살성이 희고 여리시다. 결혼하기 전까지 치맛말로 꽁꽁 싸매고 있던 엄마의 여린 젖꼭지는 아기의 젖 빠는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엄마의 첫아기였던 내가 젖을 빨기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어 엄마의 젖꼭지 피부는 바로 갈라지고 터졌다. 엄마가 느껴야 했던 고통은 둘째치고 한번 젖을 빨고 나면 아기 입가에 피가 벌겋게 묻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먹을 것을 탐하면서도 기본 체력이 부실해 운동장 조회 시간에 픽 쓰러지는 등 빌빌거리기 일쑤였던 나는 그 원인을 젖배 곯았던 탓으로 돌렸다. 우유병 젖꼭지에 대한 동경이 있어 어렸을 때 막내 동생이 빨던 우유병을 어른들 몰래 빨아보기도 했는데, 그 역시 젖배 곯은 탓으로 돌렸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장난스럽게 할머니 가슴을 더듬곤 했는데, 그 역시 엄마 젖배를 곯아서라고 둘러댔다. 겨울을 넘긴 거무죽죽하고 쭈글쭈글한 산수유 열매를 보고 말라비틀어진 노파의 젖꼭지 같다고 묘사하게 되는 것도 엄마 젖꼭지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때문에 나는 아기를 낳으면 반드시 수유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아기 백일 때까지 젖을 먹이는 것이 출산 전 내 목표였다. 내 형편상 어차피 수유를 오래 할 순 없을 것이고, 백일이 지나면 젖떼기 힘들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설정한 나름의 목표였다.
난산 끝에 한 수술이어서인지 수술 후 가스가 쉽게 나오지 않아 거의 나흘이 다 되도록 링거에 의지한 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젖가슴에 뭔가 툭툭 이상한 느낌이 오더니 환자복 가슴께가 점점이 젖어들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초유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정말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기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도무지 참을 수 없고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그런 감정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남편 00 씨를 채근해 링거 밀대를 밀며 신생아실로 향했다.
유리창 밖에서 바라보니 아기는 병원에서 준 분유를 배불리 먹었는지, 옆에는 빈 우유병이 널브러져 있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난 또 몹시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배신감 같은 것이었는데, 남편이 나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다 들켜도 그 이상의 감정은 아닐 것 같은, 생전 가져보지 못한 해괴망측한 감정이었다.
엄마가 젖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철없이 매정하게 남이 주는 분유나 먹고 만족스럽게 잠에 빠져 있다니… 뭐 그런 배신감이었다. 나는 휑하니 병실로 돌아가 서툰 솜씨였지만 젖을 다 짜버렸다. 물론 링거를 꽂은 채 수유를 할 수도 없었고, 온갖 약물이 몸 안에 들어갔을 터라 아기에게 초유를 먹일 생각도 없었지만, 뭔가 아이의 배신에 복수하는 느낌이었다. 대체 이성적이라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수유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세를 잡는 것도 어려웠고, 처음엔 젖도 충분하지 않았다. 출산 전에 책에서 하라는 대로 열심히 관리한다곤 했지만 처음 한동안은 젖꼭지가 갈라 터질 것 같은 고통에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특히 새벽의 수유는 고통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자세도 유연해지고, 젖도 충분해지고, 아기와의 호흡도 잘 맞아갔다. 젖 빠느라 힘들어 송골송골 맺힌 아기 이마의 땀을 닦아 주고, 또 조심스레 토닥토닥 트림을 시키며 아기에게서 나는 젖 냄새를 맡을 때면, ‘그래, 내가 바로 엄마야’하는 마음이 들었다. 젖 빠느라 힘들어 자기도 모르게 방귀를 뀌고 그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를 보고 깔깔 웃음을 참지 못했던 그 평화로움은 아마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아기가 배가 고플 때가 되면 찌릿찌릿 경미한 통증이 가슴에 느껴지면서 젖이 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심한 설렘을 느낄 때와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다. 젖이 찌릿찌릿하면서 신호를 주면 아기가 배가 고플 때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젖이 찌릿찌릿 돌기 시작하면 그냥 무조건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한다는 본능이 온몸과 마음을 지배했고, 바로 옆에 아기가 없으면 조바심에 안절부절못했다.
어릴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가 있다.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한 새댁이 갓난아기를 남겨 두고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쳤다. 그런데 동구 밖을 벗어나자마자 찌릿찌릿하며 젖이 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새댁은 마치 미친 여자처럼 허겁지겁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는 것이다. 난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동물적인 본능이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산후조리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시댁에 다니러 갔다. 남편 00 씨의 운전이 서툴러 기차를 타고 갔는데, 난 기차 안에서도 수유를 했다. 그때는 기차 안에 수유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어서 그냥 객석에서 수유를 했다. 남편 00 씨가 열심히 가려주긴 했지만 난 마치 시골 장터에서 젖가슴을 꺼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아낙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뭐 어때. 난 엄마야’하는 기분이었다.
갈수록 젖이 많아져서 아이 둘도 너끈히 키울 정도가 되었는데, 아기는 오히려 그렇게 부지런히 젖을 빨지 않았다. 꾀가 생긴 아기는 특히 졸릴 때면 잠투정을 하면서 젖보다 빨기 쉬운 우유병을 선호했다. 남아도는 젖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침대 시트가 흥건히 젖어 있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슈퍼마켓에서 계산을 하는 도중에 찌릿찌릿하면서 바로 툭툭 떨어지는 젖 때문에 얇은 티셔츠가 젖어 들어가 민망해 어쩔 줄 몰라하기도 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애초 목표보다 열흘 앞당겨 90일 만에 젖을 끊기로 했다.
아기는 젖을 딱 끊었는데도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고 바로 우유병 하고 친해졌다. 매정한 녀석. 하루 정도 지켜보다가 약국에서 젖 끊는 약을 사서 먹었다. 당시는 의사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약을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슴이 점점 퉁퉁 붓고 움직일 때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젖 끊는 약이 있다는 것 외는 얻어들은 의학 상식이 없어서 원래 그런 것이니 참아야 하는 줄 알았다.
하필이면 그날 시부모님께서 갑자기 서울에 오셨다고 연락이 왔다. 젖가슴이 아파 끙끙거리면서도 저녁 식사로 뭘 준비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공교롭게 지방 대학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고 있던 친구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서울 학회에 왔는데 시간이 조금 남으니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시부모님께서 오셔서 나가기 힘들겠다고 하니 친구가 잠깐이나마 얼굴이라도 보겠다며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아버님께서는 저녁을 밖에서 드신다고 하시고 어머님께서 먼저 도착하셨다. 어머님 쉴 자리를 봐드리면서 지금 젖을 끊는 중이라 몸이 몹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어머님은 아기 수유에 관해 어떤 간섭도 하신 적이 없는데 왠지 그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다. 출산 후 아버님께서 푹 고아 먹으라고 보내주신 보양식품에 인삼이 들어 있었는데, 어머님께서 전화로 인삼이 젖을 말린다고 하니 인삼은 빼고 다리라고 하셨다. 때문에 내가 이리 일찍 아기 젖을 끊는다면 서운해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지레 든 것이다.
어머님이 쉬시는 동안 끙끙 앓는 소리를 속으로 삼키며 저녁 찬거리를 다듬고 있는데 친구가 도착했다. 어머님께 간단하게 인사만 드리고 친구를 공부방으로 끌고 가 내 상황을 설명했다. 정말 의사들은 친구 체면이고 뭐고 봐주지 않는다. 다짜고짜 ‘야, 좀 보자. 옷 좀 올려봐’ 하더니 퉁퉁 붓고 아파서 건드리지도 못할 것 같은 내 젖가슴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두세 번 쿡쿡 찔러보았다. 그러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한심하다는 듯 ‘너 이러다 정말 큰일 나’ 하면서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일단 젖을 다 짜낸 다음 압박 붕대로 꽁꽁 싸매고 젖 끊는 약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친구는 시간이 없다며 차도 한 잔 마시지 않고 선 자리에서 가버렸다.
때 마침 귀가한 남편 00 씨에게 압박 붕대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고 욕실에 들어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신음을 삼키며 젖을 짜냈다. 그게 그렇게 아픈 일인지 미처 몰랐다. 그리고 압박 붕대로 싸매고 나니 일단 움직일 때마다 아프지 않아서 살 것만 같았다. 젖은 순조롭게 가라앉았고,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었다. 그렇게 나의 그 기이하고도 소중했던 한시적 본능도 영원히 사라졌다.
만약 그날 그 친구가 집에 오지 않았다면 난 분명 며칠간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염증이라도 생겼으면 고생은 더 했을 것이다. 그 친구도 결혼 생활에 아이까지 키우면서 레지던트를 하느라 나보다 훨씬 더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날 우리 집까지 올 생각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우리 집까지 전철 타는 시간만 40분이 걸리는 거리였고, 시부모님께서 와 계신다고까지 했는데 말이다. 조상님께서 보내주셨나? 아무튼 ‘친구야, 나 아직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단다. 정말 고마워. 잘 지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