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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태 Apr 25. 2024

100세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1) 워라밸, 중용인가? 중도인가?

‘일과 삶’의 균형이란 의미를 가진,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영어권에서는 1970년대부터 work-and-life balance, 2000년대부터 work-life balance, 한국에서는 2017년부터 '워크 라이프 밸런스'의 앞글자만 딴 신조어로서 워라밸.)” <나무위키>
워라밸(Work Life Balance)?

일과 삶의 밸런스,  젊은 시절 그리도 부르짖던 이상향이다. 결국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해 행복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다. 유교적 중용(中庸)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과 삶이라는 양 측의 조화를 이룬 중간점을 찾아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바램이랄까?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아 보이는 이 균형이 쉽질 않다. 살아가다 보면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겐 일에 목매고, 그러다 막상 그토록 갈망하던 직장인이 되고 나면 금세 자유가 그리워진다. 


이 또한 잠깐, 나이가 들어가며, 은퇴를 맞으면 그토록 그리던 자유가 찾아왔건만 제대로 즐기기는커녕 공허함과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평생을 배우자와 자식을 위해 달려왔건만, 남은 건 자유가 아니라 쓸쓸함이다. 이렇듯, '균형'이란, 말처럼 싶질 않다. 언젠간 나이 들고, 그날이 오면 하리라 벼르며, 모든 걸 미뤄만 왔다.


공부는 시험 치기 전에 하는 거란던가? 그럼 노후대책은 어떤가?

당연히 노후에 하는 대책이 아니라, 노후에 대비해서 젊은 날에 해둬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질 못하다.

"나중에ㆍㆍㆍ", 그러다 결국, 시험을, 노후를 맞이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자!

중용적 균형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지혜의 눈을 뜨고  중도실상(中道實相). 즉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여기서도 극단적인 대립구도의 양변으로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일과 삶을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보고, 이 둘의 중간을 균형점으로 보면서 시작된 문제일 수 있다.  


중도적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둘이 아니라, 그냥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면(不二)? 그냥 매 순간 마주한 지금을 거부하고, 미루기보단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즐거움으로 맞이한다면?


일하면서 주말을 그리느라, 지금 일이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은가? 주말에 놀면서 다가올 월요일부터 몰려들 일거리 걱정에 젖어 있지는 않은가? 이게 최악일 듯싶다.


"어차피 올 일은 오고, 갈 시간은 가는데" 말이다. 일할 땐 일하고, 놀 땐 놀자!


▶ 고락상즉(苦樂相卽)

오르막이 있었으니, 내리막을 맞는 것은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 언덕이 100m 일지, 900, 1000m 일지는 몰랐지만, 분명한 건, 오른 만큼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우리는 어떤 때는 내리막을 즐기기 위해 힘든 오르막을 기어 올라가기도 한다. 스키 슬로프처럼.


직장에서의 고된 한 주간을 보내고, 주말이면 힐링을 위해 텃밭을 가꾸고, 낚시를 즐기고, 자전거로 땀을 흘린다. 누구에겐 그 밭은, 그 바다는 그 자전거는 일터인데, 또 누구에겐  즐거움을 주는 도구이다. 죽어라 일만 해야 하기에 땡치면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픈 지겨운 이 도시에, 어떤 이들은 힘들게 일해 모은 돈으로 여행차 오기도 한다.


누구는 돈을 받고 컴퓨터 코딩이나 프로그램 개발을 하면서도, 지겹고 힘들어하는 데, 또 어떤 이는 돈을 내고, PC방에 죽치고 앉아 며칠  밤낮을 꼬박 새우고도 시간이 가는 줄도 지겨운 줄도 모르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다.  각각 다른 남의 일이 아니다. 하루종일 일로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집에 와선 게임이나 채팅을 즐기는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일과 삶은 둘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다르게 된 것일까?

시발점은 분별심이다. 일과 생활을 극단의 양 변으로 놓고 구분했기 때문은 아닐까? 삶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전체 과정이고, 일이란 삶의 일부로, 삶을 위한 주요한 도구 또는 보급원일 수도 있다. 대립관계는 결코 아니다. 일의 외형적 객관적 모습만으로는 구분조차 어려운 경우도 많다. 누구에게는 낚시가 취미, 힐링이지만 누구에게는 생계수단이지 않는가? 심지어는 취미생활을 하며 돈도 버는 프로 선수들도 있으니...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은 사냥, 수렵도 하고, 곡식도 가꾸며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일도 유희도 구분할 수 없는 하나였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태어났으니 성장하고, 늙어가고, 사라지는 것이다.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일에  대한 개념 또한 상대적  개념이요, 변할 수밖에 없다. 결국은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즐기는 것, 그것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은 고통이요, 여가는 즐거움이라는 편견은 결국 내 마음이 만들어낸 2분법일 뿐, 본질은 그렇지 아니하다. 상대적일 뿐, 이것이라고 이름 짓는 순간 저것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일이든 여유든 본질은 변하고, 우리는 소통을 원한다는 것이다.


돈 버는 것만이 일이 아니라, 배움, 봉사로 까지 삶을 위한 일의 기능과 개념을 확장해 놓고 보면, 참여와 소통이 본질이란 걸 좀 더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어찌 되었건, 시니어의 정신건강, 최소한 치매방지를 위해서라도 뇌의 활성화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소통, 그 방법으로 일ㆍ배움ㆍ봉사가 꼭 필요한 것이다.


▶ 긍정적 자세로 즐기자!

어차피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 가버린 과거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저항하거나 집착하기보단 지금 여기 내 앞에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즐기는 긍정적 자세가  필요하다.


돈보다는 잘할 수 있고, 즐거운 일을 선택하자!

물론, 물질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들로선 나와 가족의 생계유지라는 최소한의 경제적 부담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돈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한다. 돈에 대한 만족 또한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돈에 대한 욕망이 불러온 비극들은 주위에서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가능하다면, 잘할 수 있고, 즐거운 일들을 우선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고통받는 일보다는 좋아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일들을 말이다. 당장 본업으로 선택할 수 없다 하더라도, 100세 시대, 긴 노후를 위해서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 선택할 수 없다면 주어진 일들을, 순간들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 어른 된 자세일 듯하다.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왜, 이 일을 하는가? 나와 나를 의지하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리 놓고 보면, 즐겁지 않은가?


▶ 지금 이 순간!

엘리베이터로 편히 올라가느냐?

가파른 고지를 타고 올라가느냐?

뚜벅뚜벅 평지를 걸어 만리를 가느냐?


결국은 내려와야 하고, 돌아와야 한다.

어떤 길을 택했던 결과만 따진다면 결국은 죽음만 남는다. 목표, 결과만을 쫓다 보면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간 어리석음만 남게 된다.


이래서 진정한 즐거움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여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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