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꽃
한 계절이 다 가도록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불안과 초조감이 은연중에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다중적인 것이다. 자식들 문제에서도 한 발 떨어져 있고, 나 자신에 대한 질문도 느긋해져 가는데, 내부로 밀고 들어오는 나라 밖의 전쟁 소식들은 마치 바늘침에 찔릴 듯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다. 햇살에 환히 빛나는 국화꽃 무리를 그대로 즐겨도 될까. 내 나라 밖의 전쟁이 서서히 내 나라와 연결될까 봐 국화꽃 노란빛에 온전히 안길 수가 없다. 전쟁이나 불안한 세상에 지나치게 민감한, 방어력 약한 한 인간의 마음이길 바라며 나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국화를 보고 있다.
이 꽃이 피기까지 얼마나 뜨거운 여름을 지나왔나. 나는 마치 내 마음의 보석을 꺼내어 자랑하고픈 심정으로 이 국화를 기다렸다. 마냥 평화롭게 호사를 부리기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답지 않은 가을을 보내는 시월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가장 가을다운 포근함이 내린 어제오늘, 햇살 받은 국화는 찬란하기 그지없다. 시월의 마지막이라는 감상에 기대어 한 해와 오십 대의 마지막 가을이라는, 다소 허전한 단념과 오지 않은 미지의 시간을 걸러내 본다.
자연 세계에서는 실질적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라 열매는 더 단단히 겨울 채비에 들 것이고, 잎들은 내년을 위해 단풍으로, 거름으로 순환의 길에 들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유독 제때에 단풍이 들지 않는다. 요 며칠 사이 서둘러 단풍이 들기도 했겠지만, 일찍 단풍이 든 벚나무 등 몇 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아직 푸르뎅뎅한 잎을 달고 있거나 비바람에 떨어져 낡은 초록빛으로 썩어가거나 한다.
지금 나무들은 단풍으로 피어나야 할 때, 그러나 단풍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이 자신을 비켜간 듯했을 때, 삶은 얼마나 쓸쓸하고 아픈 것이겠는가. 저 나무가 꼭 그걸 겪고 있는 것 같아, 아파온다.
나는 빛을 잃은 초록의 나무처럼 내 인생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가장 처음으로 기억하는 것은 내 나이 29살, 딱 오늘처럼 10월의 마지막날이었다. 서른을 앞둔 그때, 나는 아마도 내 인생의 중대한 변곡점을 찍으려 했던 것일 거다. 당시 나는 마흔까지만 멋지게 살고 더 이상 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던 터라 서른이 되기 전 무언가 특별하게 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앞으로 십 년이면 충분하다 내 인생!
그러나 나는 5개월 된 아이를 안고 이제 절대 그럴 수 없음을, 부모로서의 길에 들어 선, 빼도 박도 못하는 책임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첫 아이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훨씬 컸다. 어떻게 내가 제대로 된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밤잠을 설치고 울어대는 아이만큼이나 민감하게 다가왔다.
시월의 마지막날, 그날 나는 5개월 된 아이를 안고 엉엉 울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는 씁쓸함, 막막함 등이 밀려와서다. 청춘을 이대로 떠나보내고 돌이킬 수 없는 미지의 시간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부모라는 길에서 아등바등하게 될 것임을 예감했던 것이다. 육아와 살림과 노동은 현실이었고, 문학적 취향은 이상이 되어버린 시점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대의 마지막 시월은 지금 50대의 마지막 시월이 되었다. 열심히 밥벌이를 했고, 사별을 했고, 퇴직을 했고, 길었던 지난 시간은 압축팩처럼 느껴지며 별 거 아니구나 싶다. 기억보다는 망각이 더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고민은 깊다. 이대로 많은 걸 망각하며 지내게 된다면 나는 지금까지 왜 계속 '어떻게 살 것인가'에 골몰했던가. 인생이 운동이나 여행이나 맛난 음식으로만 채워져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말이다. 대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문장이 되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머릿속의 생각들, 이는 붉게 물들기도 전에 조락하는 잎들처럼 아마도 늙어감의 징조일 것이나, 나는, 어떤 빛깔을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해 부끄럽게도 물러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풍으로 물들지 못한 푸르뎅뎅한 나무들은 노랗게 물들기를 밤낮으로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은 저 애처로운 것들이 단풍으로 물들기도 전에 그냥 힘없이 툭 떨어져 내릴까 봐, 가을을 타지도 못하고 그의 한 계절이 사라질까 봐 마음이 쓰이지만, 분명 제 본성을 다해 햇빛과 이슬을 받아 삭히고 있을 것이다. 꽃으로 피지도 못하고 맺혀있던 봉우리가 꽃으로 피어나던 것을 보던 때처럼.
시월 초쯤이었던가.
아무리 길고 뜨거웠던 여름이어도 초록의 나무들엔 열매가 맺혔다. 계절의 흐름은 어김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늦된 것들이 피어났다.
계절의 환대도 다 지나 꽃 지우고 열매를 이뤘는데, 여름나무 가지 끝에 새로이 꽃이 피고 있었다. 힘을 뺀 배롱나무엔 열매가 염주알처럼 달렸고, 그 옆 한 가지 끝엔 하얀 배롱꽃 한 덩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었다. 어쩌다 이제야 꽃으로 나오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아직 지지 않은 꽃이었던가 싶었지만, 다른 가지 꽃들이 열매를 만드는 사이 낮과 밤의 널뛰기 기온으로 뒤늦게 꽃봉오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제 속에 품은 것은 기어이 내놓고야 마는 것인가 보았다.
늦게 피어난 것은 비단 배롱나무만이 아니었다. 텃밭에는 도라지가 그랬다. 도라지들은 마른 열매껍질을 벌려 이미 씨앗을 내뱉기 시작했는데, 이제 갓 핀 이 한 포기는 싱싱하게 보랏빛 꽃잎을 헤벌리고 있었다. 울타리의 붉은 인동 몇 송이가 그랬고, 비탈의 나팔꽃이 그랬다.
늦된 것들이었다. 한물 지나간 시기에, 남들이 환하게 봐주지도 않는데, 이제 피어나서 얼마나 어떻게 견디려나 싶었다. 그러나 내 애련한 마음과는 달리 이 늦은 꽃들은 외로이 매달렸어도 저 혼자 꿋꿋하더니, 작은 열매가 되었다. 같은 계절 속에 살아도 저마다의 시간은 또 따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내심 반갑고 반가웠다.
늦된 꽃들이나, 단풍으로 물들지 못한 푸른 잎들이나, 그리고 나처럼 좋은 시절 다 지나 망각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마지막 쉰의 오후가 불안하고 두렵지 않다면, 이 상심과 맞설 용기와 안간힘을 낼 생각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면이 때를 만나지 못하고 길을 잃을 때, 계절 다 지나 사람들의 환대도 저물어 존재감마저 희미해질 때, 피지 못한 것들의 상심은 그 얼마나 깊은 것일지. 상심을 견디며 일생을 마쳐야 하는 것을 운명으로 자처한다면, 허무가 이런 것일 거다. 이루지 못한 존재들에게 시간은 자꾸 움츠려 들려한다.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만으로도 하루가 바삐 간다. 맞서야 하니까.
늦된 존재들이 지지 않고 반짝이며 피도록, 불안이 꿋꿋한 열매와 붉은 단풍으로 피도록, 살아있음이 반짝이며 피도록, 시월의 마지막날이 이런 다짐으로 굳건하도록!
어쩌면 때 늦은 존재의 불안이 존재의 이유를 완성할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