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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진 Oct 18. 2023

지나치게 착한 등장인물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해 6


“쟤도 일찍 죽겠구나”

 

나는 드라마를 보다 간혹 지나치게 착한 인물이 등장하면 쟤는 곧 불행해질 거라고 짐작한다. 드라마는 시청자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분노와 슬픔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착한 인물은 불행하거나 상처받기 쉽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은 상처받기 쉽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내 마음의 전부는 주지 않고, 기대치를 높이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사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합리적’이라는 변명에 기댄, 나의 ‘합리화’ 일 뿐이었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은 잔혹하다. 그 후폭풍이 두려웠다. 더 이상 깊은 사랑은 하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있던 나에게 친구는 말했다. “사랑은 만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야”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만들어간 ‘ 사랑이라는 게, 서너 명 번호를 물어본 뒤, 한 명을 고른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난 헌팅을 안 해서 그럴 일 없는데?"라며 선을 그었다.

사람들은 술집에서 만난 이성을 안 좋게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거기까진 이해된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아예 무시해 버리거나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술집에서 만난 이성은 이상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에는 동감한다.

다만, 운명적인 사랑을 믿으면서 장소를 따진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운명이고 나발이고 그저 안정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생존 본능이다.

따라서 내가 추구하는 사랑 역시 안정적일 뿐, 정상적인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마음에 생긴 응어리가 덩어리가 되어 갈 때쯤, 나에게 지나치게 착한 인물이 등장했다.




그날은 군인인 내가 첫 휴가를 나온 날이었다.

나는 일병을 단지도 얼마 안 된, 흔히 말하는 짬찌(짬밥 찌그레기) 였지만, 선임들은 어디 가서 티 내고 다니지 말라며 상병 계급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일반인들 눈에는 다 똑같은 군인일 뿐이지만 그땐 몰랐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고속버스에 탑승한 나는 오랜만에 핸드폰을 만져보고, 새로 나온 노래를 들으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들자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오랜만에 여자와 마주하자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내가 긴장했다는 걸 알면 분명 나를 불순한 군바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이어폰을 뺀 뒤,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잘못 들었습니다?”


이것이 너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잘못 나온 말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네가 나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자리라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롭게 일어나 비켜주었지만, 속으로는 연신 욕을 되뇌었다. 그렇게 버스는 곧 출발했다.

나는 친구에게 방금 있던 일을 자백하며, 그저 웃픈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있었지만, 너는 다시 나를 툭툭 건드렸다.

‘왜 쪽팔리게 말을 거는 거야?’라는 생각보단, 그래도 설레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네?”

“휴가 나오셨나 봐요?”

“네..”

“오 좋겠다~”

 

그러고는 침묵이 흘렀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어폰을 다시 끼고, 딴청을 피웠겠지만, 군대가 나를 바꿔놓은 것일까? 나는 질문을 했다.

 

“강원도 사시나 봐요?”

“아, 본집이 강원도고 전 진접에서 자취해요”

 

나는 “아.. 네”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접이 어딘지는 몰랐다. 그 뒤로는 버스 엔진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제야 이어폰을 다시 끼고 눈을 질끈 감은채, 오지 않는 잠을 청하였다.



 

아침 일찍 기상했던 탓일까? 아님,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쳐서였을까?

나는 순식간에 오지 않던 잠에 들었고, 도착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네가 날 깨워주었다.

나는 꾸벅 감사인사를 한 뒤 고개를 돌렸지만, 너는 오늘만 세 번째 나를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나 역시 세 번째, 아니, 두 번째 같은 대답을 했다.

 

“네?”

“혹시 오늘 뭐 하세요?”

 

주변의 여자라고는 가족밖에 없던 나의 일정은 남자들과의 술약속으로 꽉 차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시그널이라는 것을 알아챌 정도의 눈치는 남아 있었다.

 

“... 저 뭐 없는데요?”

“아, 저도 오늘 할 거 없는데.. 번호 교환 하실래요?”

 

그때 넌, 누가 봐도 덤덤하지 않은 그 표정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그 뒤로 너와 많은 얘기를 했다.

진접이 남양주란 걸 알았고, 네가 아직 학생인 것 도, 나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것도 알았다. 그날 밤 우린 진접에서 술을 마시며 서로를 심도 있게 알아 갔다. 네가 꾸밈없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땐 어떤 이성과도 만날 생각이 없었고, 그저 휴가를 나와서 놀만한 여자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건지, 외박이며 휴가며, 내가 나올 때마다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누구보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기를 자처했다. 네가 나에게 하는 것은 자원봉사나 마찬가지였다. 바꿔 말하자면 나에게는 다신 없을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문제점이 두 가지 정도 있었다.

첫 번째는, 네가 좋은 사람인 걸 알면 알수록, 내 열등감이 새어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인이라는 특성상 너와 만날 시간이 적었던 나는 오히려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아울러 군인인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애 한 명쯤은, 옆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네가 나를 전역이 10개월 남은 상병인 줄 안다는 것이다.

애초에 속이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던 바람에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왔고,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너에게 솔직하게 말한 건, 네가 나의 전역이 5개월 정도 남은 줄 알았을 때였다. 나는 혼자 전전긍긍하던 고민을 이번 휴가를 나가면 사실대로 말하기로 다짐했다. 휴가를 나온 당일, 너에게 “사실 나 전역 400일 남았어 속여서 미안해”라며 무표정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호떡집에 불난 것보다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이런 마음이 무색하게도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유 그랬어~ 언제 말하나 했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상병이 아닌 것 같다는 건 눈치챘다고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남았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고 한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너는 그런 나를 보고선 대수롭지 않게, 아니,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기간이 뭐 중요한가? 지금 우리가 같이 있는데”

 

그저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대가 없는 사랑이라도 온몸을 내던지는 불합리한 사람,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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