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이 시를 썼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그리움은 때로 외로움이다. 성인 2명 중 1명이 앓고 있는 병, 외로움. 우리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낀다. 왜 그럴까?
201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영국의 한 42세 여자가 소셜 미디어에 자살하겠다고 글을 올렸다. 소셜 네트워크로 그녀와 친구를 맺고 있던 사람은 1,500명. 그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녀가 올린 글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는 절박한 절규였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각자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디지털 속에 산다. 가족과 친구, 동료가 있어도 온라인 세상에서만 관계를 맺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카카오톡, 블로그, 카페, 밴드,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많은 소셜 네트워크를 거미줄처럼 쳐놓고, 그 거미줄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다. 쉴 새 없이 누군가와 뭔가를 주고받지만 사실 점점 더 허망하고 외로워진다.
외로움은 공허감을 느끼게 한다. 고립되어 있다는 절망적인 느낌을 주고 단절되어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니까 외로운 건 ‘연결된 듯 연결 안 된’ 관계의 부재,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도, 당신 곁에 있는 그 누군가도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홀로 외로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외롭거나 고독한 이유가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연결은 되고 싶지만 복잡하게 얽히는 것도, 상처받는 것도 싫은 마음이 원인이다. 공감하며 소통하고 싶지만 수반되는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감내하기 싫은 것이다. ‘연결된 느낌’을 주는 스마트폰 뒤로 숨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치유 상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국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사람이 외로운 이유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마음의 문을 열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불수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한다는 것. 마음 문을 열었다가 자칫 상대가 나를 따뜻하게 지지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떠벌리거나 악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대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할 수밖에. 진짜 자기 모습을 감춘 채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관계에서 깊은 유대감이나 연결감을 느끼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의 속마음을 터놓고 나눌 사람이 없다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다.
깊은 유대감과 연결감을 느끼기 원한다면 걸어 잠근 방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중요한 건 마음의 문에는 바깥쪽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열지 않으면 밖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열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1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거기엔 ‘혼자’의 외로움과 고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화 ‘레옹’의 주인공이 화분에 담은 식물(아글라오네마)을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고 정성껏 가꾼 것도 외로움 때문일 수 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식물을 ‘제일 친한 친구’라고 불렀을까.
당신에게는 힘들거나 우울할 때 맘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가. ‘우울할 때 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 수’를 묻는 설문조사에 10명 중 한 명 꼴로 ‘단 1명도 없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우리의 인간관계 실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면 떠오르는 고전이 있다. 영어로 쓰인 최초의 소설로 여겨지는 다니엘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1719년)다.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모험심이 강했던 로빈슨 크루소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누리는 행복에 관해 설득시키려는 아버지의 말에 반발해 가출한다. 선원이 되었지만 아프리카 연안에서 무어 인에게 붙들려 노예가 된다. 도망쳐 브라질 농장에 일자리를 얻게 되고, 농장주의 의뢰를 받아 흑인 노예를 구하러 아프리카로 가던 도중에 배가 파선한다. 무려 28년에 걸친 무인도 생활을 하게 된다.
로빈슨은 난파선에서 식량과 무기, 의류, 연장 등을 운반해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섬에는 맹수가 없고 기후도 따뜻하다. 로빈슨은 지금껏 자신이 살면서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졌던 물건들을 모두 버리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을 시작한다. 심지어 말하는 법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지독한 외로움을 겪는다.
로빈슨은 문명인이었던 과거의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난파선에서 간신히 건진 잉크는 이미 바닷물에 묽어진 상태. 일기장에 쓴 글씨들은 하나하나 희미하게 바래가고 결국 모두 사라지고 만다. 로빈슨은 절대적인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어느 날 섬에 식인종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움을 느낀다. 24년째가 되던 해, 식인종에게 붙들린 토인을 가까스로 구출하게 되고 하인으로 삼는다. 그날이 금요일이어서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짓는다. 지독한 외로움에서 해방된다. 그 뒤로 프라이데이의 아버지와 스페인 사람 하나를 구한다. 27년째 되는 해에 배 한 척이 섬에 도착한다.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로빈슨은 선장 편에 서서 선원들의 반란을 진압한다.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을 섬에 남겨둔 채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장장 27년간의 무인도 생활과 지독한 외로움. 우리의 외로움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외롭다면 굳게 걸어 잠근 방문을 힘껏 열어젖혀야 한다. 그리고 손을 뻗을 일이다. 누군가는 있을 테니까. 설령 영판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인간이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때로 자기 성찰의 촉매가 되기도 하고. 안 그런 척 하지만 사실은 너무도 외로운 당신. 다시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연결되어 기대고 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