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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경 Jan 16. 2024

별 하나에 추억과 쓸쓸함

Track no.4 <My love> by 이승철

오전반 수업을 들으니 수업 끝나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이러려고 베를린 왔지! 베를린은 정말 계획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녀도 볼거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야.

구동독이었던 지역의 신호등은 조금 특별해. 신호등에 저렇게 귀여운 사람이 그려져 있거든. 신호등을 독일어로 Ampel이라고 하고 (남자) 사람을 Mann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 신호등에 그려진 캐릭터를 암펠만 (Ampelmann)이라고 불러. 내가 살던 예나도 이전에 구동독 지역이었어서 신호등에 암펠만이 그려져 있어. 그 시작점이 베를린이어서 암펠만은 베를린을 상징하는 캐릭터 중 하나이기도 해. 베를린 곳곳에 암펠만과 관련된 귀여운 소품을 파는 암펠만 샵(Ampelmann shop)이 있으니 혹시 베를린에 온다면 구글맵에 검색해서 방문해 봐.

초록색은 이렇게 생겼어. 너무 귀엽지 않아? 보일 때마다 찍으려고 하는데 마음처럼 예쁘게 안 찍히네.

겨울 독일은 해가 너무 빨리 져서 나처럼 밤길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밤에 아무리 밝아도 돌아다니기가 버거워. 실제로 가로등 불빛이 밝지도 않고. 이 날은 지난 편에서 말했던 BVG고객센터에서 호되게 혼나고 온 날이었는데 스트레스 해소엔 소파나 침대에 기대 감자칩을 씹으면서 유튜브 보는 것 만한 일이 없더라. 독일은 감자가 주식인 만큼 감자 관련된 요리도 많고 감자칩 종류와 맛도 다양해. 아무 마트에나 들어가면 살 수 있는데 나는 지난번 독일살이 때 즐겨 먹었던 Kessel chip을 주로 사 먹어. 이 과자의 단점은 조금 비싸. 한 봉지에 2.4유로 정도. 그렇지만 다른 감자칩을 먹어봤을 때 상대적으로 덜 짜고 맛도 실패했던 적이 적었어서 늘 손이 가더라고.

그리고 드디어 되너를 먹었어! 이거 한국 가면 진짜 생각난다니까. 한국에 파는 케밥이랑은 차원이 달라. 터키에서 케밥을 먹어보지는 않았는데 예나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되너는 실패하지 않고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야. 그런데 보다시피 조금 많이 커서^^ 샌드위치처럼 베어물기 힘들거든. 내 팁은 같이 주는 포크로 고기랑 야채를 좀 먹다가 빵이 닫힐 수 있을 때쯤 닫아서 베어먹으면 돼.


주문할 때 써브웨이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거든. 야채 다 넣을 거냐 소스는 뭘로 할 거냐 등등. 예나에서는 안 그랬는데 베를린 되너집에는 가끔 가다가 야채에 고수가 있더라고? 처음에 야채 다 넣어달라고 했다가

이렇게 생긴 게 있길래 고수냐고 물어봤는데 그렇다고 해서 얼른 빼달라고 했어..ㅎㅎ 여기 말고도 구동독 지역에는 옛날에 베트남에서 이민을 많이 왔어서 베트남 음식점이 많은데 어디든지 고수를 빼고 싶다면 ohne Koriander(오네 코리안더: 고수 빼고 주세요)라고 꼭 말해야 해. 아니면 샴푸맛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거든. (고수 좋아하시는 분들 죄송해요)

아까 잠깐 이야기했듯 베를린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전시나 공연을 볼 수 있는, 나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야. 오전반으로 수업을 옮긴 이유도 대부분의 갤러리나 미술관이 7시에 닫아서 수업이 끝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였거든. 지난 며칠 동안 전시를 정말 많이 봤어.


그로피우스 바우라는 유명한 현대미술관에서 하는 제너럴 아이디어라는 캐나다 예술가 집단의 전시를 보러 갔어. 멤버는 총 3명이었는데 작품들이 정말 신선하고 유쾌했어.

그런데 왜 이런 유쾌한 작품을 내놓는 작가들의 결말은 슬플까. 이 멤버들 중 두 명이 전염병 (추측건대 에이즈. 에이즈로 특정되는 단서들이 전시와 작품 설명 곳곳에 녹아있었어.)으로 세상을 떠났어. 관람 도중에 작품 설명을 보고 알아차린 건데 그때부터 유쾌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작품들과 대비되는 작가들의 서사가 마음을 찡하게 했어. 이들은 "image is virus"라는 모토로 시각적 이미지나 형태가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오브제, 영상, 설치물 등을 통해서 풀어내. '이미지는 바이러스다'라는 말을 이미지가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사유하는 대신 보이는 대로 믿는다는 정도로 해석했었는데, 수업시간에 다룬 발터 벤야민이나 귄터 안더스의 매체이론과 맥락이 비슷해서 공감이 갔던 부분이야.

이 작품을 보러 갔는데, 기대를 너무 했는지 실망스러웠어. 작품에 실망했다기보다 공간과 디피가 작품을 다 못 담아내는 느낌이었어. 밑에 설치된 조명이 정말 정말 밝은데 예상대로라면 위에 있는 은색 풍선에 빛이 반사돼 공간 전체가 빛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조명만 빛나는 느낌. 그리고 사진에는 안 나왔는데 출구 역할을 하는 한쪽 벽면을 대충 검은 천으로만 덕지덕지 막아놓았는데 미관상 정말 안 예뻤어.

관람 도중 얻어걸린 노을 지는 하늘. 떠 있는 열기구와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건물이 너무 예쁘더라! 이런 풍경을 보면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느껴.

아, 맞아. 전시 보러 가는데 우연히 향수샵을 발견했어. 참새가 방앗간 절대 못 지나치지. Frau Tonis Berlin이라는 가겐데 made in Berlin이라고 적혀 있어서 직원 분께 물어보니까 향료는 다른 곳에서 얻어 오기도 하는데 향들을 만들 때 베를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향수들이라고 해. 그냥 도시마다 있는 기념품샵 정도의 가게라고 생각했는데
제품들을 fragrantica에서도 찾을 수 있더라고.

시향 했던 것들 중 베스트 4였는데, 기념으로 작은 걸 하나 샀어. 내가 뭘 샀을지 맞혀봐. 참고로 내 취향은 엄청난 스파이시만 제외하면 탑노트는 상관없는데 미들이나 베이스에 파우더리 하고 바닐라가 있는 향을 좋아해. 원래 취향과는 아주 조금 다른 향을 샀어!

그리고 이 날은 우리 홈스테이 집주인 아주머니의 생신이어서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어. 우리 주인 분들이 정말 좋으셔. 지난 밤에 나보고 베지테리언인지, 고기를 먹어도 괜찮은지까지 물어봐주신 섬세한 분이야. (독일에서는 이 질문이 보편적인 편이야. 환경과 동물권을 생각해서 베지테리언인 사람들이 많거든. 그래서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꼭 베지테리언인지, 우유를 일반 우유로 할지 락토 프리 우유로 할 지도 늘 물어봐줘.) 이 날 초대받은 손님이 약 6-7명 정도 되었는데 대부분 아주머니의 친구분들이셨거든. 근데 이 날 서로 처음 본 분들도 있었어. 정말.. 파티 좋아하고 손님 초대하는 거 좋아하는 재밌는 나라야.

독일사람들이 한국인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편이거든. (예나에서 만난 독일친구들은 정말 발음을 잘해.. 놀라울 정도야) 그래서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이름 앞글자만 따서 '수'라고 불러. 평소에 주인아주머니 아저씨가 나를 Hallo Sue라고 부르는 게 되게 다정하게 느껴졌었는데 이 날 저녁식사에서도 아주머니 친구분들이 다들 Hey Sue, 하고 불러주셔서 좋았어. 낯선 동양인이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말이야. 나중에는 당신들끼리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겠다고 엄청 용을 쓰시면서 서로 경쟁했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게 따뜻하고 재밌었어.

주인아주머니가 "Willkommen zum Deutsch Kurs!" (독일어 수업시간에 온 걸 환영해)라며 농담하셨는데 정말로 말이 너-무 빨라서 거의 못 알아들었어. 식사를 하면서 나한테 다들 많이 질문을 해 주셨는데 Wie bitte? (독일어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라는 뜻이야)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도 천천히 다시 질문해 주셔서 좋았어. 나에게 해 주신 질문들 몇 개를 공유해 볼게.

재미있지 않아? 아무래도 예전에 독일도 분단국가여서 그런지 독일사람들이 한국을 아예 모르시지 않더라고.

향신료 향이 살짝 나긴 했지만 음식도 맛있었고 (무엇보다 쌀밥을 해주셨어. 나보고 한국에서 먹는 거랑 맛이 비슷하냐고도 물어주셨고.) 주고받은 이야기도 재미있었어. 전시도 보고 저녁도 배부르게 먹으니 아주 노곤하더라고. 정리 조금 도와드리고 방으로 와서 바로 뻗은 하루였어.  

내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영어 대신 계속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당연히 독일어를 더 잘하고 싶기도 하고, 독일어를 사용하면 외국인, 이방인 같다는 느낌이 덜해서 이기도 해. 아무래도 낯선 나라에서 언어라도 통하면 잘 못 알아듣더라도 혼자라는 데서 오는 쓸쓸함은 줄일 수 있더라고.


내 꿈은 평생 별을 보면서 사는 거야. 별이 잘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싶어. 첫 번째 독일살이를 했던 예나는 소도시이기도 하고 우리 집이 산에 있었어서 추워도 집으로 올라가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게 행복 중 하나였는데, 베를린에서 하나 아쉬운 점이 별을 잘 볼 수가 없어. 날이 흐려서 더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해. 가끔 너무 피곤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별까지 안 보이는 일이 나를 조금 슬프게 하거든. 하지만 별 대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그 쓸쓸함을 달랠 수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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