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일기
복싱장 건물에는 학원이 많다. 1층에는 도넛 가게, 2층에는 피아노와 태권도 학원, 3층에는 태권도 학원과 교회, 4층에는 스터디 카페 그리고 복싱장이 있다. 피아노 연주와 태권도 기합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음악과 ‘땡’ 소리, 내 허벅지 정도 오는 키의 아이들의 수다로 북적북적하다.
등록 첫날, 나에겐 4층까지 올라가는 것부터 운동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한 걸음씩 올라가는 계단마다 “다이어트 복싱 4층”, “재미있는 복싱 4층” 이 적힌 광고가 붙어있었다. 포기하지 말고 어서 오라고, 다이어트도 되고 재미도 있는 복싱장이라고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문 앞에 도착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환한 조명에 검은색 천장과 바닥,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평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사각형의 링, 나란하게 서 있는 3개의 샌드백, 거울 앞에서 줄넘기를 뛰는 학생들, 2개의 러닝머신과 각종 근력운동 기계들, 그 앞엔 약간 허름한 큰 창문들. 그리고 한눈에 봐도 몇십 년간 운동만 한 것 같은 다부진 체격에 스포츠머리를 한 관장님까지. 복싱장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아래는 복싱 새내기가 파악해본 복싱장 사용 설명서다.
복싱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출석체크를 해야 한다. 나는 자주 까먹는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면 관장님이 출석체크 하세요! 하고 부르신다. 나중에 보니 꽤 오래 다닌 사람들도 종종 출석체크를 잊고 운동을 시작했다.
패드에 핸드폰 뒷자리를 입력하면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하는 음성과 함께 오늘 날짜에 파란 동그라미가 생긴다. 한 달간의 출석 상황을 볼 수 있다. 관장님은 출석체크 시스템이 학부모들이 아이가 몇 시에 왔는지 물어볼 때 유용하다고 했다. 복싱장에서는 등 하원 관리까지 가능하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려면 운동용 신발로 갈아 신어야 한다. 복싱장 한쪽 벽 면에는 신발장이 늘어서 있다. 자신에게 배정된 정사각형 칸에 신발과 글러브, 밴디지(손목 보호 장갑)를 함께 둔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등록했던 분은 내 옆 칸이었다. 어느 날은 짐이 다 빠져있고 이름표만 남았다.
복싱장에는 여러 가지 안내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성인 월, 목, 금 미트 / 화, 수 아령
학생 화, 수, 금 미트 / 월, 목 아령
어떤 요일에 무슨 운동을 하는지 보면 성인인지 학생인지 알 수 있다. 성인인 줄 알았는데 학생인 경우가 많다. 아마 나를 보며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가족, 연인, 친구, 부부 외 회원에게 말 걸지 마세요
나는 이곳에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배우자도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은데 기회가 없어 관장님하고만 가끔 수다를 떤다. 다시 한번 안내문을 본다. 그렇다. 부부는 가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복싱의 모든 질서는 “땡” 소리로 결정된다. 3분 경기 - 30초 휴식에 맞춰진 타임 벨이 운동하는 내내 울린다. 2분 30초가 되면 “삐” 소리가 나온다. 앞으로 30초가 남았으며 더 열심히 뛰라는 뜻이라고 한다. 줄넘기를 할 때도, 혼자서 자세 연습을 할 때도, 샌드백을 칠 때도 ‘30초만 버티면 된다’와 ‘30초 정도는 일찍 끝내자’는 생각이 매번 싸운다. 끝나기 30초 전을 미리 알려주고, 힘내라고 격려까지 해주는 시계. 이 시계로 움직이는 복싱은 의외로 따뜻한 운동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복싱장은 복싱뿐만 아니라 최신 노래도 배울 수 있다. 유행하는 팝송부터 알 수 없는 EDM, K-pop까지 다양한 최신곡이 번갈아 나온다. 나는 케이팝 여자 아이돌 노래가 나오는 걸 좋아한다.
특히 갓더비트 스텝 백, 아이브 일레븐, 르세라핌 안티프레자일을 들을 땐 강해지는 기분이다. “가시밭길 위로 riding you made me boost up …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 … Anti ti ti ti fragile fragile” 주먹을 비장하게 뻗게 된다.
복싱장은 주 5일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운동이 기본이다. 한 학생이 일주일에 1번 나오자 관장님이 여기가 교회냐고 하셨다. 관장님은 그 많은 회원들을 지도하면서 누군가 한 번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슬그머니 다가와 “어제 안 나오셨죠?” 묻는다. 나는 저녁에 약속도 없고, 딱히 빠질 이유도 없어서 주 5일 출석한다. 이제 건강검진을 받을 때 ‘주 5일 과격한 운동 30분 이상’을 체크할 수 있다. 매일 저녁 약속이 없으면 좋겠다.
한때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계속해서 루틴을 지키는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루틴이 삶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마냥 똑같은 하루는 없다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그 성실함이 얼마나 큰 장점인지도 안다. 우선순위도 없이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이제는 복싱을 기준으로 하루를 다시 계획한다.
2022.12.30 복싱일기
오늘 12월 30일 저녁반은 3명이 전부였다.
다들 저녁 약속 갔겠지? 나는야 고독한 복서
복싱 삼일이면 버틸만하다. 집에 와서는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 겸 요가를 1시간 한다.
스트레칭까지 하고 나면 온전히 내 시간이다. 스탠드 조명을 켜고, 핸드폰과 애플워치를 충전시키고, 전기장판을 켜고, 안락의자에 앉는다. 담요를 덮고, 헤드폰을 쓴다. 재즈를 들으며 이렇게 글을 쓰거나 밀린 답장을 하거나 일기를 적는다.
저녁 있는 삶이 얼마 만인지..! 이렇게 시간을 분리할 수 있는 걸 일을 내내 미루다가 밤까지 주구장창 괴롭던 어제는 안녕
* '권투를 빌어요'는 '건투(健鬪)를 빈다'를 권투적 허용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의지를 굽히지 않고 씩씩하게 잘 싸운다'는 뜻은 건투(健鬪)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