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집에 놀러 가도 되니?

음료수 뭐 좋아해?

by 오아린

오래전, 친구에게 무례하게 말했던 일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20대 후반에 같이 대학원 졸업시험을 준비하던 스터디 메이트였다. 나와 동갑에 털털하고 화끈한 입담을 가진 친구라서, 대화가 늘 편했고 함께 밥 먹고 공부하는 시간에 신경 쓸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내가 나에게 방심을 한 것일까. 무의식이 의식을 거치지 않고 이빨도 거치지 않고 재채기하듯 쏟아져 나온 문장을 후회한다.


"친구야, 백화점 오는데 옷을 너무 편하게 입고 왔구나. 근데 내가 아줌마고 너는 아가씨잖아."

써놓고 보니 더 어이가 없다. 어렸던 20대 끝자락, 그녀의 미천한 인식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아줌마는 편하게 입어도 되고, 아가씨는 남들이 보기에 예뻐 보이게 입어야 한다는 건가. 사실 지금도 고백하자면, 요란하게 입는 아줌마를 보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늘 과하지 않은지 체크하고 하나씩 덜어내는 패션을 고수하고 있다(누구를 위해서인지는 모름). 그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불편함이므로, 무한으로 자책해도 어쩔 수 없다. 친구에게는 의식과 영혼을 다해 세 번 사과하였고,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하고 싶다.


끊임없는 반성 덕분에 실례가 들어올 틈 없도록 의식 근육은 커져 나를 지키고 있고, 아직도 가끔씩 고개를 내미는 보수적이고 개인적인 편견 덩어리는 깎아도 깎아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남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다. 남의 집을 간다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의 영역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사람의 삶의 취향을 한꺼번에 알게 되는 것은 그에게 또는 나에게 안전한 일일까? 몰라도 되는 것을 알아서 실망하는 일은 없을까? 이렇게 발설하는 나를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예민하다고 볼까. 아니다. 생각해 보라. 남자친구의 부모님 댁에 초대받은 일 따위의 기억, 또는 존경하는 선생님의 집에 초대되는 일. 불편함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모두 나의 예민함과 연결될 것이라 믿는다. 여러 가지 성격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같은 종의 인간이다. 그러니 계속 공감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이 글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 나감 주의.




사실 몹시 불편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 집에 가는 것보다 우리 집에 누가 오는 일이다. 그것은 나의 40년 전 돌잔치 때 판명되었다. 손님이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생일잔치 주인공은 울고 또 울었고, 결국에는 초대한 자가 초대받아 온 손님들을 다 내쫓아버렸다. 한 살의 아린은, 낯선 사람이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안전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그 이유를 마흔한 살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는 가끔 트러블이 있었고, 아이들이 절친을 만드는 데는 적잖이 애가 쓰였다.


막상 어르신들이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시거나 어린아이들이 온 집을 들쑤셔놔도 나는 괜찮았다. 철저히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어리고 편협한 시야 속 사전 고민일 뿐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집에 초대하고 초대받는 일이 유쾌하고 즐거운 파티일 수 있다. 반대로, 나에게는 초대받는 일이 황송하고 감사한 것이고, 초대하는 일은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많이 여는 일이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미소 지으며 떨리지 않는 음성으로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는 불혹이 된 내가 한 살 때의 물렁했던 알맹이를 떠올리면 도대체 몇 겹의 방패를 입고 살고 있는 것인지 새삼 신기하고 대견스러워지는 지점이다.


내 성장기의 우리 집은 언제나 파리가 찾아와도 낯설도록 깨끗해서 다시 나갈 정도로, 늘 청결하고 어지르기 싫어지도록 정돈되어 있었다. 엄마는 집 앞 슈퍼 갈 때에도 예쁘게 입었다. 대학생이 되어 독립을 하고 자취생활을 할 때는 엄마가 가끔 와서 입버릇처럼 말하던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을 치워주고 가기도 했다. 이제야 좀 깔끔하게 하고 산다며 엄마가 무뎌진 것인지 내가 잘하게 된 것인지 모를 살림의 중간선을 찾았다. 나는 남의 집에 놀러 다니게 된 이후로 알았다. 깔끔하지 않게 사는 집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결점이 아니라 생활의 자연스러운 흔적이다. 이제 와서 느끼지만, 엄마는 결벽증에 가까운 깔끔쟁이였다. 그리고 나는 낯가림이 있는 기질에 깔끔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 쉬운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내 편견과 아집의 틀을 벗어나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환경에 나를 보내봐야 한다. 아직도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집에 초대도 해보고 남의 집에 놀러도 가봐야 더 넓어진 사람이 되는 것을 느낀다. 다름은 판단재료가 아니라 성장재료이다.




대회를 앞두고 다양하고 낯선 장소에서 경기 연습을 해볼 필요를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혼자서는 '우리 클럽에 놀러 오세요.'라든가 '저는 OO클럽 소속 40대 초심 여자 OOO입니다. 놀러 가도 될까요?'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른 클럽에 친구나 배우자가 소속되어 있어야 게스트 신청하기가 수월하다. 나는 다른 클럽에 지인이 아무도 없었지만, 이번 대회에 같이 나가는 파트너 언니 덕분에 이 집 저 집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시에서 운영하는 깨끗하고 널찍한 체육관에서 오전 시간에 운동한다. 보통 배드민턴 클럽은 지역 학교 강당을 빌려 저녁에 운동을 한다. 다녀보니 비교적 우리 체육관보다 규모가 작고 천장이 낮았다. 코트 수가 적어서 운동을 하는 사람만큼이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연스레, 경기 관전자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빈 코트가 없어서 무대 위에서 난타 연습을 하는 동호인들도 보였다. 우리 집보다 환경이 좋지 않지만 더 열성적으로 임하는 분위기가 새로웠다. 다녀와서 보면 우리 체육관 조명은 또 너무 밝게 느껴졌다.


초대받은 게스트는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 스포츠음료를 챙겨가는 것이 좋다. 잘 마실게요, 라는 말을 듣고 한 게임 부탁드립니다, 라고 많이 들어본 대화도 따라 해본다.


"언니, 여기 조명도 다르고 바닥 선도 잘 안 보여서 헷갈리네요. 낯설어서 평소보다 더 못하는 것 같아요."

"아린 씨, 자꾸 다녀보고 새로운 사람들이랑 쳐봐야 늘어. 대회장 가도 이런 기분 들 거야."


과연 일리 있는 말이었다. 엄마가 주는 밥만 먹고 큰 아이는 나가서 아무거나 못 먹는다. 이것도 저것도 다 먹어보고 큰 놈이 아무 데서나 잘 먹는다. 그렇게 놓쳐서 떨어진 셔틀콕을 보며 다짐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공을 받아보자. 입이 짧았던 초심자가 작은 그릇을 내려두고 더 큰 그릇을 집는다. 용기 내어 이것저것 담아본다.


'뿌잉. 여긴 벽 색깔이 너무 낯설어...'

오늘은 파란 맛... 이겨 내 이겨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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