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자만이 즐길 수 있는 법
"이모, 아니 선생님! 저 일본어 배우고 싶어요."
올봄, 그러니까 내가 배드민턴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때쯤이다. 오랜 지인이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면서 과외 요청을 했다. 수업 대상은 어릴 때부터 봐왔던 지인의 아들, 정호였다. 이미 성격과 취향을 잘 알고 있어 어린이 학생을 받는 데에 대한 부담은 덜 했다. 유치원 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게임, 피규어에 빠져있어 이쪽 분야는 나보다 더 많은 일본정보를 갖고 있을 게 분명했다. 5년 이상 매일 좋아하는 영상을 현지어로 들어서 분명 무시 못 할 만큼 일본어에 노출되었을 터였다.
첫 만남. 예상대로 귀가 많이 트여있었다. 만화 홍보 영상 클립을 틀어서 얼마나 알아듣는지 봤더니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어도 듣고 있었다. 문제는 외국어->한국어 재생은 되는데 다시 물어보면 한국어->외국어는 나오지 않았다(일한통역 가능이나 한일통역 불가). 당연하다. 그렇게 재생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일본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언어 발화의 통로가 한쪽으로만 나 있던 것. 한국어로 해석을 시키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듣고 넘기는 찰나에 선생인 내가 개입하는 것 자체를 어색해했다.
-정호. 방금 滑降(かっこう)라는 말 알아들었어?
-네, 활강이요.
-활강이 일본어로 뭐야?
-...모르겠어요.
우리는 수업을 시작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무엇보다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았다. 학생의 엄마는 일단 까막눈을 뜨게 해달라고 했고(까막손이기도 하고), 학생은 나중에 일본유학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까막눈에서 유학생까지. 험난해 보이는 낯선 길이었다.
-今日から日本語の勉強をします。(오늘부터 일본어 공부를 합시다.)
-(끄덕끄덕)
-最初の教材はチョンホに易しすぎるかもしれない。(첫 교재는 정호한테 너무 쉬울 수도 있어.)
-(끄덕끄덕)
-文字を覚えることから始めるからね。(글자 외우는 것부터 시작할 거니까.)
-(끄덕...)...네.
-「はい」くらいは言えるのに。 (일본어로 '네' 정도는 말할 수 있을 텐데.)
-...はい!('네!')
일본어로 말할 때만 과묵해지는 어린 손님이 내게로 왔다.
먼 목표는 목표대로 두고 지금 밟아야 할 숙제들이 자갈밭 위의 돌멩이 수만큼 많이 깔려있다. 내가 정해준 학습 방향은 귀가 트인 만큼 입도 트이도록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다. 우선은, 아직 10대 초반의 친구에게 즐거움 가득한 수업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워밍업으로 같이 듣고 싶은 영상을 골라서 놓치는 부분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을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외우고 싶은 노래를 같이 불러보기도 했다. 정호가 한창 들떠 수다가 깊어질 때쯤 수업 교재를 펴고 글자와 단어를 가르쳐줬다. 어린 나이에 비해 잘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어른스럽고 성실해서 나는 이 과정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10대 후반에 귀가 꽉 막힌 채로 일본어를 배운 나와 친구들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인지)글자를 어렵지 않게 금방 외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손님의 경우에는, 한 달이면 되겠지 싶었던 왕왕초 단어 읽기는 석 달이 되어서야 편해졌다. 그즈음부터 동화를 짧게 요약한 책의 문장 독해가 시작되었다.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고 회화도 더듬더듬 될 때쯤 문법이 포함된 어른용 기초 종합 교재를 시작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배워서 올해 말이나 내년에 JLPT 5급을 치면 우수한 성적이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5급만큼의 말을 하고 쓰고 읽을 수 있을 때까지(귀는 잠시 진정해 주는 것으로)그렇게 권할 생각이었다. 친구가 일찍 시작한 만큼 균형 있게 천천히 잘 배워서 급수를 올리는 재미를 가지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이상 만고 내 생각이었음은, 이하 동상이몽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연초 생인 정호는 뭐든 남들보다 빨리 배워서 잘하는 것에 익숙한 친구다. 태권도 띠 색깔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도전해서 다음 목표를 좇는 것에 진심인 아이다. 일본어능력시험도 친한 누나가 4급을 땄다고 말하며 본인도 응시해 보고 싶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나는 5급을 권한다고 말했고 정호는 의아해했다. 물론 너의 청해 수준은 3급, 아니 2급도 어쩌면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독해는 이제 시작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정호는 엄마와 함께 상의해 보겠다고 했고, 다시 만난 수업에서 4급과 5급 중에서 고민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5급이면 편안하게 모든 문제를 이해하면서 풀 수 있을 텐데 4급은 지금 수준에서는 찍는 문제가 많아서 떨어질 확률도 낮지 않다고 재차 말렸다. 그럼 붙을 확률도 있는 건가 싶은 눈빛으로(동질감을 느끼고 내 기세가 꺾인 지점) 정호는 결국 4급을 지원한다고 정했다. 그냥 선생님의 권위를 내세워 아직 안 된다고 할 걸 그랬다. 안된다고. 그렇게 붙어서도 안 된다고.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나 또한 그랬다. 배드민턴 입문 5개월 차에 대회라니. 발목이 접질릴 만도 한 것이었다. 배드민턴의 신이 과열된 나를 그렇게 말린 것이다. 그렇게 나가면 안 된다. 그렇게 나가서 이겨서도 안 된다고. 대회라는 것이 어떤 분위기인지 보기 위해 한 번 나가보는 마음이 아니었다. 나가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고, 본인이 이 정도면 단기간에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배친자의 흔들리는 눈빛이 약간 안정을 찾은 요즘, 새삼 몇 개월 전의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싶다.
다시 대회를 준비하는 요즘에는 코치님의 피드백에 더 귀 기울인다. 다 알아듣고도 몸이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것은 '아린 님은 안정적인 것만 하려고 해서 그래요.'라는 오랜 성격 탓임을 코치도 알아봐 주었다. '공을 못 쳐도 괜찮으니까 이해한 대로 해봐요. 못 해도 괜찮아.' 어쩌다 이해와 동작이 맞아떨어졌을 때 선생님은 눈을 크게 뜨고 맞다고 끄덕끄덕해 줬다. 어쩌다 되는 성공이 쌓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런 시간 속에서 내가 할 것의 9할은 실패 경험이다. 이것을 잘 받아들이면 결국 내가 아닌 내가 보낸 시간이 만들어주는 결실이 따라올 것이리라.
나는 아직도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초심의 애송이다. 씨앗이다. 대회를 나가는 것은 방향을 갖고 의미 있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고 확실한 목표를 찾아오기 위함이다. 승급하려고 실력 있는 파트너를 찾아서는 잃는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
리듬의 조화가 어쩌다 또 어쩌다 맞아지는, 허락된 시간에 감사하며. 애송이들의 모든 실패를 응원한다.
이번 주 시험을 치는 정호를 같은 초심자로서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해 줘야겠다. 성공이든 실패든 만나면 또다시 따뜻한 초심으로 공부시켜 줘야지. 나도 너처럼 싹 틔우고 싶은 씨앗이 있으니, 그 마음 잘 알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