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의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으며
둑새풀과 자운영꽃
8월에 올해 처음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완전히 관통하여 지날 것이라며 소동인 아침이다. 흐린 하늘에서 간간히 비가 오기는 하지만 아직 태풍의 기미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늘은 목요일. 평소같으면 140번 버스를 타고 길상사를 향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태풍으로 봉사자들의 안전을 위해 반찬나눔봉사를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고 맑고 향기롭게 사무국에서 통보가 왔다. 뜻하지 않은 아침 여유에 라디오를 켜고 책을 펴들었다.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 산문집이다. 그녀가 곡성이라는 곳에서 살면서 세 아이와 함께한 날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이 아침에 책 제목과 같은 글 한 편을 읽는다.
“독새기 풀밭에서 뒹굴다가 하늘을 보고 누워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불렀지요.
‘풀 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파아란 하늘과 흰 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우풀어 오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오래 불러요.’
세상에나,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부른다면서 어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솟아나는지요.”
(둑새풀이라고도 한다. 논밭 같은 습지에서 무리지어 난다. 줄기는 밑 부분에서 여러 개로 갈라져 곧게 서고 높이가 20∼40cm이다. 잎은 편평하고.......
꽃은 5∼6월에 피고 꽃이삭은 원기둥 모양으로 길이가 3∼8cm이며 연한 녹색이고, 작은이삭은 길이가 3∼3.5mm이고 좌우로 납작하며 1개의 꽃이 들어 있다.
수술은 3개이고,암술은 1개이며,꽃밥은 오렌지색이다. 소의 먹이로 쓰는데...)
대나무가 뒤란을 가득히 채워 살고 있는 내가 태어난 고향집의 허름한 담장 너머에는 계단식에 가까운 논이 있다. 눈이 녹고 처녀, 총각의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따뜻한 바람이 비를 데려오면, 불현듯 갈라진 논바닥에서는 두시럭 두시럭 파란 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풀을 ‘독새’라고 불렀다. 독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돋아 났으니까. 어른들이 논에 물이 잡히고 모내기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독새’를 소가 끄는 쟁기로 뒤집는 일이다. ‘어이구 독한 넘들’이라고 한 말씀 빼놓지 않았다. 그즈음 거의 모든 논에는 ‘독새’가 이미 녹색의 꽃이삭에 노르스름한 꽃가루를 달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길지 않은 풀의 꽃이삭을 밑에서부터 위로 스르륵 쓸어 올리면, 손에는 서늘한 부드러움과 함께 노란 화분이 묻어났다. 빈 꼴망태를 옆에 내버려 두고 독새풀이 촘촘히 난 곳을 골라 드러눕는다. 그때 올려다본 하늘의 아득한 아름다움이라니! 내 봄은 그렇게 ‘독새’와 함께 익었다. 그 오랜 느낌이 글 한 줄에 생생하게 딸려 나왔다.
“자운영 꽃밭은 너무나 고와서 함부로 드러눕지 못하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과 푸른 풀밭과 붉은 자운영 꽃밭이 그 어린 눈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져서 울었던 것일까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람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자운영(紫雲英). ‘자주색 구름 꽃부리’
이름만 불러도 풀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동질감이 있다. 나를 부르는, 그리운 이의 목소리가 메아리되어 들리는 듯이 느껴지는 애틋한 느낌의 풀.
젊은 시절 어느 해, 남도에 가면 논바닥에 온통 자주빛의 자운영꽃이 가득하여 파란잎과 자주색 꽃 그리고 봄 하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나섰던 적이 있다. 그 식물은 뿌리혹박테리아와 공생하여 질소를 고정하는 특성으로 농부들이 벼내기 전에 갈아엎어 녹비로 활용하므로, 논농사가 많은 남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는 글도 봤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자운영이 가득한 논에 가면 내 온몸을 풀밭에 숨기고 반듯이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기를 바랐었다.
(연화초(蓮花草)·홍화채(紅花菜)·쇄미제(碎米濟)·야화생이라고도 한다. 중국 원산으로 논·밭·풀밭 등에서 자란다. 밑에서 가지가 많이 갈라져 옆으로 자라다가 곧게 서서 높이 10∼25cm가 된다. 줄기는 사각형이다. 잎은 1회 깃꼴겹잎이고 작은잎은 9∼11개이며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
꽃은 4∼5월에 피고 길이 10∼20cm의 꽃줄기 끝에 7∼10개가 산형(傘形)으로 달리며 홍색빛을 띤 자주색이다. 꽃받침은 흰색 털이 드문드문 있으며 ....)
그날 현대식 농법으로 바뀐 남도의 어느 들녘에서도 무리를 지어 피어난 자운영꽃을 보지 못하고 헛헛한 마음으로 돌아와야만 했었다.
언제가 내가 죽어 기회가 닿으면 엄니가 “아가 밥 먹으래이”하고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반가운 울음 꾹 참고, 자운영 들판에 누워, 꿈쩍하지 않고, 자줏빛 꽃이 옆에서 흔들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