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자아의 해체_윤리와 연약함

단단하지 않은 자아의 용기

by 김형건

누군가는 말한다. 세상이 거칠고 빠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단단해져야 한다고. 흔들리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정말 단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단단함을 생존의 미덕으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단단한 것은 부러진다. 압력에 견디다 어느 순간 산산이 조각난다. 반면 연약한 것은, 구겨지고 뒤틀릴지언정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흐르고 흡수하며, 형태를 바꾸어 살아남는다. 윤리도 마찬가지다. 강한 신념보다, 연약한 감수성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




확신의 윤리에서, 개방의 윤리로

우리는 윤리를 종종 ‘확신의 문제’로 오해한다. 도덕적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옳은 행동을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윤리는 확신이 아니라 결핍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타인을 다 알 수 없기에 조심하고, 나의 판단이 틀릴 수 있기에 주저하며, 말보다 먼저 멈추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 앞에서의 윤리를 “말문이 막히는 경험”에서 찾는다. 그는 타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이미 ‘책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것은 계산된 도덕이 아니라, 감각적인 윤리이다. 그 윤리는 확신이 아닌 머뭇거림에서, 논리가 아닌 침묵에서, 그리고 명확함이 아닌 연약함에서 출발한다.


연약함은 회피가 아니라 감당의 방식이다

연약함은 약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자, 타자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단단한 자아는 쉽게 판단하고 단정하지만, 연약한 자아는 쉽게 흔들리고 쉽게 멈춘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만 진짜 타자의 존재가 감각된다.


우리는 자꾸 강해지려 한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혹은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상처받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감당하려는 마음, 그것이 윤리다.


윤리는 원래 연약한 것이다

윤리는 법보다 약하다. 윤리는 제도보다 느리고, 시스템보다 모호하다. 그것은 강제력이 없고, 명확한 결과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는 언제나 위험하다. 누군가는 윤리를 믿지 않고, 누군가는 악용할 수 있으며, 누군가는 그 느림을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된다. 가장 약한 것만이,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사라지고, 관계가 멀어져도, 윤리의 울림은 남는다. 그것은 논리로 정리되지 않기에 오래간다. 감정에 스며들기에 지워지지 않는다. 연약한 윤리야말로, 감응적 존재가 이 세계에 남길 수 있는 가장 단단한 흔적이다.




실천으로서의 연약함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고, 윤리는 세계를 살아내는 방식이다. 우리가 말한 감응적 존재론이 이론에 머물지 않기 위해선, 그것이 삶의 실천 윤리로 이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연약함의 윤리’이다. 이 윤리는 다음을 요청한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즉각적으로 판단하지 않기

이해하지 못한 말들 앞에서 말을 유보하기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앞에서 곁에 머물기

너무 빨리 나를 정의하려는 충동에서 물러서기


이러한 태도는 느려 보이고, 때로는 무기력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결심 중 하나다. 빠르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일부러 느리게 사는 것. 단단함을 요구받는 시대에, 연약함을 껴안는 것. 그것은 결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고요하고 단호한 윤리적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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