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 사
감응 이후에도, 세계는 빠르다
우리는 감응적 존재로 이행하려 한다. 자존감이라는 자기 중심적 구호를 벗고, 타자의 떨림에 반응하며, 윤리적 자기 감각을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플랫폼은 여전히 실시간 반응을 요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계발과 성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며, 늦은 사람은 도태된다는 공포가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는 감응하려는 한편,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
감응은 느린 과정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느린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감응은 기다림을 필요로 하지만, 지금 우리는 즉시성과 효율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감응하는 윤리를 품은 존재가 이 세계에서 버틸 수 있을까? 혹은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비평가’이자 ‘피평가자’로 객체화해야 하는가?
시간의 구조가 바뀌었다
한때 시간은 흐름이었다. 인간은 해가 뜨고 지는 리듬에 따라 움직였고, 계절과 성장, 소멸의 주기를 순환하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시간은 자연의 질서에 속했고, 인간의 존재는 그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응집된 방식으로 성숙했다. 삶은 기다림이었고, 늦음은 실패가 아니라 시간의 일부였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시간은 구조를 달리한다. 시계는 시간의 단위를 쪼개고, 캘린더는 미래를 선점하며, 기술은 현재를 속보로 바꾼다. 하루는 일정이 되고, 일상은 루틴이 되며, 감정조차 시간 내에 처리되어야 할 업무로 간주된다.
이 변화의 핵심은 단지 속도의 증가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늦음'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는 기다릴 수 없고, 기다릴 줄도 모른다. 시간은 살아가는 흐름이 아니라, 타자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계량 가능한 자원이 되어버렸다.
늦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죄가 된다. 판단은 속도를 요구받고, 감정은 빠르게 정리되어야 하며, 반응은 훈련된 민첩성의 결과로 간주된다. 우리는 감응할 틈도 없이 응답해야 하며, 존재보다는 속도에 의해 신뢰를 획득한다.
감응은 ‘지체’가 아니다
감응적 존재는 이러한 시간의 제도화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감응은 반사적 반응이 아니다. 감응은 이해 이전의 정지이고, 판단 이전의 머무름이며, 해석되기 전에 일어나는 존재의 울림이다. 감응은 타자의 언어보다 침묵에 먼저 응답하고, 사건의 원인보다 감각의 떨림에 반응한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이 감응을 ‘지체’로 해석한다. 천천히 대답하는 사람은 무능하게 보이고, 생각이 멈춰 있는 사람은 게으른 것으로 취급된다. 관계는 속도를 기준으로 평가되고, 느림은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에 적절치 못한 리듬으로 배제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정확히 무엇이 느리다는 것인가?’
‘감응의 시간은 왜 그렇게 불편하게 여겨지는가?’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순간, 그 침묵 속에서 윤리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낭시는 ‘존재는 함께 존재함 속에서 진동한다’고 했고, 로자는 이 진동을 '공명'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즉시성의 윤리’가 아닌, ‘머무름의 윤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머무름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시스템은 감응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계산한다. 그러나 감응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의 클릭을 추적하고, 선호를 예측하며, 추천을 최적화하지만, 머뭇거림은 계산할 수 없다. 주저함은 오류로 분류되고, 망설임은 처리 지연으로 기록된다. 시스템은 감정을 정량화할 수는 있어도, 감응의 리듬을 구조화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감응적 존재는 기술 시스템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어긋난다. 감응은 측정할 수 없고, 반복할 수 없으며,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 실패’처럼 보인다.
감응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이 실패의 징후를 감수하는 일이다. 즉각적인 해명을 유보하고, 반응의 속도를 늦추며, 오해와 불신의 리스크를 감내하는 일이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효율의 논리에 비해, 감응의 윤리는 너무 느리고, 너무 복잡하며, 너무 인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무 인간적인 것’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
감응 이후, 살아남기 위한 태도
감응은 고립이 아니다. 감응은 연결이다. 다만, 그것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빠른 접속이 아니라, 감정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연결이다. 감응은 신속한 위로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진심이 도달할 여백을 마련하는 관계의 구조다.
이때 ‘늦음’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관계를 존중하는 방식이자, 타자의 고통을 서두르지 않고 듣겠다는 윤리적 선언이다. 감응 이후의 윤리는 이 느린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으로 존재를 보존하고자 한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타인을 판단하고, 너무 성급하게 자신을 증명하며, 너무 조급하게 관계를 규정한다. 이제는 그 반대의 리듬을 회복해야 한다. 스스로를 너무 빨리 의심하지 않고, 타인에게 너무 빨리 기대하지 않으며, 관계가 ‘자라날 시간’을 존중하는 감각을 다시 배워야 한다.
느리게 살아남는 감각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지만, 윤리는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감응 이후의 긴장이란, 느림과 빠름 사이의 충돌이며, 존재를 지켜내기 위한 실천의 리듬이다.
우리는 다시금 ‘느리게 살아남는 감각’을 훈련해야 한다. 그것은 속도보다 방향을, 즉각적인 반응보다 기다림을, 이해보다 먼저 응시를 선택하는 감각이다. 이 느림 속에서야말로 존재는 비로소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의 온도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모든 존재가 빠르게 정리되고, 즉시 반응하며, 곧바로 증명되어야 하는 이 시스템 안에서, 잠시 멈춰 생각하고, 조용히 응답하며, 서서히 연결되는 삶의 가능성을 다시 붙들겠다는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