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자아의 해체_자존감이라는 유행(2/2)

자존감 이후의 존재

by 김형건

우리는 ‘자존감’이라는 시대적 생존의 언어를 통과하며, 이제 질문의 초점을 옮겨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나를 지켜야 한다는 요구는 점차 무거운 짐이 되었고, 자존감은 어느새 의무가 되었다.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조차 강요처럼 들리는 시대에, 자존감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라 ‘기준’이 되어버렸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점차 ‘사랑하지 못하는 너는 문제가 있다’는 선언으로 변질되었다.


자존감은 무너진 세계에서 ‘내가 나를 붙드는 법’이었지만, 그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오히려 자기 감각을 잃어갔다.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 억눌리고, 자존감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우리는 자존감조차 ‘갖춰야 할 스펙’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자존감은 이제 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또 다른 생존 조건이 되었다.


실존주의는 그런 시대의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철학이었다. 신이 죽은 시대,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기 자신의 프로젝트”라고 불렀고,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로 정의했다. 실존주의의 핵심은 ‘자기’였다. 그 어떤 외부의 본질도, 절대적 기준도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독한 자유를 찬양했고,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숭고한 방식이라 말했다.


그러나 그 실존주의적 인간상은, 개인이 중심에 놓인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 나의 결정, 나의 책임, 나의 자유.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 수렴된다. 이 주체적 자아는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도덕을 구성할 수 있는 존재로 상정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묻는다. 정말로 ‘자기’는 그렇게 독립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




자기의 감정화, 존재의 표준화

현대의 자아는 실존적 선택의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나’를 만들기 전에 이미 수많은 감정적 프레임 속에서 살아간다. SNS는 타인의 감정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학교나 회사는 감정노동을 관리 가능한 자산으로 간주하며, 상품은 감정적 안정을 팔기 위한 수단으로 진화했다. 우리는 느끼기도 전에 기대되고, 반응하기도 전에 규율된다.


자존감조차 그 감정 프레임에 속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내면적 확신이라기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감정의 안정성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말조차, 타인의 피드백과 비교 속에서 겨우 성립된다면, 그 자존감은 실존적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 반응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실존은 고립된 주체의 고유한 선택을 전제했지만, 지금의 자아는 그런 자유조차 감정의 조건 안에서 허락받는다.


감응하는 존재 – 나 아닌 나로 존재하기

이제 우리는 실존주의의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자기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대신, 내가 세계와 타자에 어떻게 응답하고, 그 속에서 어떤 감정적 떨림을 경험하는지를 묻는 방식. 이것이 ‘감응적 존재론’의 출발점이다.


하르트무트 로자는 이를 ‘공명(resonan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공명이란, 세계의 떨림에 내가 감정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반응하는 상태다. 감응이란 타자의 얼굴에 흔들리는 일이며, 세계의 고통에 내가 응답할 수 있는 민감함이다. 이것은 자기를 구축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성되는 존재의 흔들림이다.


장 뤽 낭시는 말한다. 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언제나 함께 존재하며, ‘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있는 껍질로서 감각된다. 이때 자기란 단단한 중심이 아니라, 응답의 피부다. 세계는 나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지만, 나의 감각을 깨운다. 감응적 존재는 그 세계와 타자의 진동에 민감하게 열려 있는 상태다.


정체성 없는 존재의 윤리

감응적 존재는 ‘자기를 갖지 않아도 된다’는 급진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를 갖지 않는 순간에 비로소 가능한 윤리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다. 정체성을 갖는 대신, 흔들릴 수 있는 감수성. 자기를 설명하는 대신, 타자를 기다리는 침묵. 자기 확신 대신, 불완전한 공명을 감내하는 느린 존재. 이 윤리는 실존주의가 놓친 것—타자성, 연결, 비중심성—을 다시 윤리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자존감이 나를 중심에 두는 윤리였다면, 감응은 나를 옆으로 밀어내는 윤리다. 내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그 무지를 견디는 것, 그 무지 속에서도 응답하는 것. 이것이 감응의 윤리다. 그것은 확신보다 망설임이 더 중요한 감정이며, 정답보다 관계가 더 중요한 태도다.




자존감 담론은 한 시대의 정서적 기획이었다. 자기 안의 중심을 세우라는 명령, 흔들리지 말라는 의무. 이제 자존감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을 던진다. “너는 너를 지킬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집중할 수 없다.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존재한다는 것은 감정을 통해 세계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타자의 진동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이 바로, 자존감 이후의 윤리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열림이며, 타자에 대한 윤리적 개방이다. 자존감은 한 시대의 응급처치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치료를 지나, 또 다른 회복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자기 중심의 담론을 지나, 타자 중심의 감응으로. 단단한 주체의 시대를 지나, 느리게 연결되는 윤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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