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없는 시대의 자기 설계도
거울이 없는 방에 한 사람이 갇혀 있다. 그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물도, 유리도, 그 어떤 반사되는 사물도 없는 세계. 그리고 어느 날, 낯선 이가 들어와 말한다.
“당신은 꽤 괜찮아 보여요.”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나’를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본 경험이 아니다. 타인의 말에 기초한 자아, 타자의 시선을 닮은 나. 이때의 자기는 내면이 아니라 투사다. 본 것이 아니라 들은 자아. 그리고 이 구조는 우리가 자주 말하는 ‘자존감’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자존감. 자기(self)를 존중한다는 이 개념은 과연 얼마나 자율적인가? 그리고 그 ‘자기’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자존감의 역설: 자기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존감(self-esteem)은 문자 그대로 ‘자기(self)에 대한 존중(esteem)’이다. 하지만 이 ‘자기’는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자기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대상이다. 즉, 자존감은 본질적인 내면의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기 이미지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우리는 자존감을 이야기할 때, 실은 자기를 향한 감각이라기보다, 자기에 대한 감정의 안정성을 말한다.
하지만 그 감정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많은 경우, 자신의 위치, 능력, 외모, 성취, 관계에 대한 사회적 비교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자존감은 ‘자기 안에서 길러낸 어떤 감정’이 아니라, 타자의 기대와 비교를 내면화한 감정의 총합일 가능성이 크다.
포스트모던의 진공: 기준이 사라진 시대에 자존감이 소비되는 방식
근대는 인간에게 거대 서사를 제공했다. 종교, 민족, 계급, 이념—삶을 해석할 수 있는 기준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20세기를 지나며 리오타르가 말했듯, 우리는 ‘거대서사의 붕괴’를 경험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어떤 삶이 성공인가에 대한 기준이 해체되면서, 인간은 공동의 이상을 잃고 개인의 내면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존감 담론은 부상한다.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은 자기 안의 중심을 찾아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바깥에서 삶의 의미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안에서 중심을 세우고, 자존감이라는 감정의 내적 기둥을 세우려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라는 것도 타자의 시선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존감은 자주 외부 기준에 대한 반응의 이름이 된다.
자본주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자존감은 교육과 심리산업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고, 상품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기능을 내세운다. 자존감은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솟구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품이자, 심리적 생존 도구가 되었다. 자존감은 나를 위해 필요하지만, 그 자존감조차 외부에서 조달된다.
비적자의 생존술로서의 자존감
진화론적 맥락에서 보면, 모든 종은 적응 가능한 유전자와 형질을 통해 ‘적자(適者)’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이 생존 경쟁의 규칙을 복잡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무수한 기준을 생산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안정된 위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때 ‘비적자’—즉, 시대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존감은 중요한 심리적 보루가 된다. 그들은 자기 안의 기준을 통해 살아남으려 한다. 자존감은 시대의 적자 생존 논리에 직접 맞서지 않되, 그로부터 무너지지 않기 위한 정서적 방패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생존술'로서의 자존감은 이미 구조의 일부다. 그것은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실패자일 필요는 없다’는 정서적 타협이다. 자존감은 비적자에게 주어진 새로운 생존 전략이며, 이 전략은 역시 자본주의적 담론 구조 안에서 통제된다. 마치 '낙오해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감정이 제공되는 순간, 그 낙오는 개인의 감정 관리로 환원되어 버리는 것처럼.
자존감 이후의 윤리: 인정받지 않아도 존재하는 나
그렇다면 자존감이 유효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존중할 수 있을까? 그것은 타자의 인정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자기 감각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자기 감각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관계적 존재이고, 모든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인정받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타자와 연결되는가에 있다.
자존감이 자기 중심의 담론이었다면, 우리는 이제 공감, 책임, 타자성, 연대의 감각을 통해 자기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은 ‘자존감’이라는 단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윤리적 자기의 형상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보다, 나를 '받아들여야'한다. 그것은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겨나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나'다.
자존감은 통과의례일 뿐이다
자존감은 한 시대의 응급처치였다. 기준이 무너진 시대, 타자와의 연결이 파편화된 삶 속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심리적 안전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도, 영원한 전략도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 담론을 통과해, 새로운 언어로 자기를 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더 이상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흔들리는 자기를 받아들이고, 타자 속에서 다시 나를 구성하려는 감각이다. 그것은 더 약하고, 더 복잡하고, 더 윤리적인 자아다. 자존감이 나를 세웠다면, 이제는 내가 나를 해체할 차례다. 그것은 브랜드도 아니고, 해시태그도 아니며, '좋아요'의 총합도 아니다. 그것은 말 없이, 그러나 꾸준히 삶을 감당해내는 어떤 존재의 무게다. 그것이야말로 자존감 이후의 윤리이며, 자아의 해체 이후에도 끝내 남는 '나'의 형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