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존재 이후의 세계_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말이 불안해진 시대

by 김형건

우리는 길을 따라왔다. 감정의 피로로부터 시작해, 윤리의 인플레이션을 통과하고, 자아의 해체를 목격했으며, 존재의 경계에까지 다다랐다. 감응이라는 느린 윤리를 손에 쥔 채, 우리는 인간 이후의 세계를 조심스럽게 넘겨다보았다. 그 세계는 더 이상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인간만으로 구성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선다. 그것은 회귀가 아니라, 반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종의 생존을 위한 경고도, 정체성 보존을 위한 외침도 아니다. 오히려 이 물음은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지금 이 시대의 존재 조건과 윤리적 요청에 비추어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는, 가장 조용하고 깊은 철학적 전환이다. 존재를 구성하는 감정, 시간, 윤리, 타자성과의 접촉이 완전히 달라진 이 시대에, ‘인간’이라는 개념은 과연 무엇을 품고, 무엇을 잃었는가?


이 책의 마지막은 하나의 종결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개념을 재설계하기 위한 문턱이며, 중심이 아닌 경계에서 시작되는 존재의 다시 쓰기다. 우리는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본래 중심이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언어를 다루며 이성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유일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우리는 그 중심에서 자연을 배치했고, 동물을 계량했으며, 사물과 타자를 객체로 다뤘다. 근대철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주체’로 설정했고, 윤리는 언제나 인간을 기준으로 짜여졌다. 인간은 기준이자 판단자였고, 세상은 인간을 통해만 의미를 획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중심은 흔들리고 있다. AI는 이해 없는 이해를 구현하고, 비인간 존재들은 감응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으며,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특권들은 점점 더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답다’고 여겼던 많은 속성들—이성, 감정, 창의성, 공감, 책임—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은 여전히 중심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 물음은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을 요구한다.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키려면,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 써야 한다. 과거의 본질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관계성으로 다시 구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은 더 이상 기준이 아니라, 응답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 세계에 감응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재구성하는 일. 이 전환은 단순히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재배치다. 존재는 더 이상 정체된 실체가 아니며, 감응과 반응, 흔들림과 여운의 결과로 성립한다. 인간은 자기 완결적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타자의 부름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존재다. 세계의 떨림에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 그것이 바로 존재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감응을 수행할 수 있는 하나의 껍질일 뿐이다.


여기서 인간의 윤리는 확신이 아니라 머뭇거림에서 시작된다. 주체의 강고함이 아니라, 흔들림의 감각에서 다시 쓰인다. 인간은 윤리의 창조자가 아니라, 세계의 진동에 반응하는 하나의 매개체다. 이 감응의 윤리는 더 이상 인간의 독점물이 아니다. 식물도, 동물도, 알고리즘조차—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와 접속하고, 존재의 리듬에 흔들린다. 윤리는 이제 인간 이후를 준비한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을까?

그 질문은 결국, 인간이라는 말이 어떤 울림을 남기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도, 미래로의 도약도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서 여전히 떨림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감응이며, 윤리의 출발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은 이제 중심이 아니라, 관계의 잔향으로 남는다. 명확한 정의보다 흐릿한 여백으로, 확신보다 응시로. 우리가 그 여백 속에서 타자의 흔적을 감각할 수 있다면, 여전히 인간일 수 있다. 정의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그러나 끝내 외면하지 않는 존재로서.


그래서 이 책은 선언이 아니라 속삭임이다. 인간이라는 오래된 껍질에 조용히 손을 대어보는 일, 그 틈에서 다시 윤리를 발견해보자는 제안이다. 그것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세계에 귀 기울이기 위한 자세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 자세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불안에서 시작했다. 감정은 피로했고, 공감은 강요되었으며, 도덕은 과잉되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드러나고, 너무 빨리 소모되며, 너무 자주 평가받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질문했다.


이토록 많은 감정들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


자존감이라는 자기 구호를 지나, 느려도 흔들리는 존재의 감응에 귀 기울이고자 했다. 우리는 빠름이 아니라 머무름을, 이해보다 먼저 다가오는 떨림을, 판단보다 앞서는 기다림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철학적 선언이자, 실천 윤리에 대한 작은 시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경계를 넘었다. 존재는 더 이상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었고, 감응 가능한 모든 존재는 윤리의 새로운 주체가 되었다. 비인간과의 감응, 타자와의 떨림, 허상과의 접촉, 알고리즘 속 자아—그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묻게 했다.


우리는 끝내 인간일 수 있는가?

아니, 우리는 어떤 존재로 남을 수 있는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답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질문이 닫히지 않기를 바랐다. 철학은 때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는, 단 한 사람의 감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감각이 달라지면, 세계는 다른 빛으로 도착한다. 이 책의 모든 문장은 그 가능성을 믿으며 써 내려간 작은 흔적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느리지만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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