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존재 이후의 세계_더 이상 추락하지 않는 사람들

실재의 부재와 감각의 자율화

by 김형건

중력이란 본래 우리를 붙잡고, 끌어당기며, 현실로 되돌리는 힘이다. 그것은 물리 법칙이자, 실존의 상징이었다. 중력 아래의 인간은 언제나 바닥을 느끼며 존재했고, 삶의 무게는 고통과 책임을 동반했다. 우리는 아팠고, 실수했고, 때로는 주저앉았지만 그 모든 것이 현실을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중력은 쓰러짐과 함께 도달하는 바닥의 감각이었고, 동시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점점 더 ‘추락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어떤 바닥에도 도달하지 않고, 어떤 실수도 완전히 실패로 귀결되지 않으며, 어떤 감정도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다. 실패는 리셋되고, 기억은 디지털 아카이브에 분산 저장된다. 현실은 더 이상 우리를 완전히 붙잡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중력이 사라진 우주 공간처럼, 부유한다.


인간은 더 이상 ‘현실에 붙들린 존재’가 아니다. 감정은 더 짧고 강렬하게 소비되고, 정체성은 이미지로 조립되며, 자기 증명은 실재의 경험이 아니라 ‘감각의 선명도’로 대체된다. 존재는 점점 가벼워지고, 실재는 점점 멀어진다.




감각의 자율화와 허상의 구조화

인간은 원래 감각을 통해 세계와 접촉하는 존재였다. 차가운 바람, 배고픔, 통증, 목소리, 흙의 냄새—이 모든 감각은 현실의 가장 직접적인 흔적들이었다. 과거의 감각은 실재에 단단히 닿아 있었다. 고통은 현실의 무게였고, 느림은 삶의 리듬이었다. 감각은 존재의 증거였고, 세계와 나 사이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이제 감각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하고 대체하는 자율적 구조로 진화했다. 우리는 더 이상 실재를 '감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을 통해 새로운 실재를 구성한다. 실제 연인보다 픽셀로 구현된 이상형이, 거칠고 무거운 자연보다 필터가 입혀진 하늘이, 인간보다 인공지능 캐릭터가 더 ‘실재처럼’ 느껴지는 세계—우리는 이 전환을 이미 통과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 같은 세계를 ‘시뮬라크르’라 불렀다. 시뮬라크르란 실재를 모방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를 삭제하고 그 자리를 점유한 허상이다. 이 허상은 점점 더 실재처럼 작동하고, 인간의 감각은 이 가상의 층위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반응한다. 감각은 더 강렬해졌지만, 그것이 닿고 있는 대상은 더 비현실적이다. 감각이 독립하고, 스스로 목적화되며, 실재는 감각을 따라가는 종속항이 된다.


그 결과, 인간은 더 풍부하게 감각하면서도 더 허공 속에 떠 있는 듯한 존재가 된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디지털의 미로를 떠돌고 있고, 감정은 경험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제공한 자극에 반응한다. 감각은 살아 있지만, 그 감각이 닿는 세계는 실체가 없다. 존재는 깊이를 잃고, 경험은 두께를 잃는다.


실재의 위기와 존재의 붕괴

우리는 더 이상 땅 위에 서 있지 않다. 어쩌면 ‘존재한다’는 감각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붕뜬 느낌"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단지 피로감이나 멘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나 사이의 존재론적 단절의 증상이다.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으나, 그 감각이 지시하는 세계는 없다. 중심은 사라졌고, 중력은 끊어졌다.


한때 실재는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재는 우리 존재의 증명이었다. 인간은 바닥이 있었기에 고통을 느꼈고, 고통이 있었기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고통은 최대한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고, 느린 감정은 무능력의 증표로 재정의된다. 우리는 고통을 사유하기보다 빠르게 넘겨야 하는 화면으로 처리하고, 관계의 균열마저도 앱 하나로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실재는 더 이상 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할 ‘불쾌한 잔여물’로 밀려났고, 그 자리를 허상이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의 질감이 아니라, 경험의 인상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점점 ‘살아지는 것 같다’는 착각으로 대체된다.


이 붕뜬 감각의 본질은 단순히 ‘현실을 덜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너무 많은 감각, 너무 많은 자극, 너무 많은 이미지 속에 살아가며, 그 모든 것에 끊임없이 반응해야 하는 존재로 재편되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실재에 닿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아무리 강렬한 감각이라도, 그 감각이 무언가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 소진되고 만다.


보드리야르는 이를 “실재의 죽음”이라 말했다. 시뮬라크르 사회는 실재의 흔적조차 잊게 만든다. 허상이 실재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아’, ‘현실을 잃어버린 주체’로 재구성된다. 이것은 단지 외로움이나 무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추락의 부재, 즉 더 이상 추락조차 하지 않는 상태다.


그렇게 인간은 감각의 과잉과 실재의 결핍 속에서, 자기 존재의 무게를 잃는다.


감각 이후의 존재 윤리

우리는 느끼기 위해 존재하고, 존재하기 위해 더 강하게 느끼려 한다. 감각은 삶을 증명하는 가장 빠른 경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감각이 실재와의 접촉을 잃는 순간, 그것은 자기 안에서만 순환하는 고립된 회로가 된다. 감각은 더 강렬해졌지만, 존재는 더 가볍고 얇아졌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의 자기중독을 부추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각을 질문하는 감각, 다시 말해 "나는 왜 이 감정을 원하는가?"를 되묻는 자기성찰의 윤리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타자와 세계에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각이 타자와의 접촉이 아니라, 자아의 강화로만 작용할 때, 우리는 결국 고립된다. 감각은 소통의 시작이어야지, 자기 증명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야 한다.


나는 이 감각 속에서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

이 감정은 타자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

이 감각은 내게 의미를 남기고 있는가, 아니면 즉각적인 자극 이후 사라지는가?


이 질문들은 감각을 실존의 방향으로 다시 이끄는 시도다. 존재는 다시금 자기중심적 감각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윤리적 감각으로 회귀한다. 감정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응답의 대상이며, 관계의 반응이며,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식이다.


이는 결코 고리타분한 도덕의 복원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필요한, 윤리의 재구성이다. 감정의 민주화 이후, 우리는 감정의 윤리를 다시 배워야 한다. ‘모두가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회’ 이후에는, ‘모두가 타인의 감정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감응적 존재론은 다시 등장한다. 감응이란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에 의해 흔들리는 감각, 세계의 떨림에 반응하는 태도다. 그것은 자아의 감정이 아니라, 타자의 도달을 허용하는 감각의 열림이다. 감응은 바로 그 틈에서 발생한다—감정이 아닌 윤리로서의 감각.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의 위기를 감각의 재구성으로, 감각의 위기를 윤리의 확장으로 이끌어야 한다. 더 이상 감각은 자아의 증명이나 생존의 기제가 아니라, 세계와의 접촉을 감당하는 책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무중력 시대의 존재 방식

우리는 더 이상 추락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추락이라는 감각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땅에 닿지 않는 발, 무게를 잃은 말, 맥락 없는 감정들. 이 무중력의 상태에서 인간은 떠오른다. 가볍고, 빠르고, 자유롭다. 하지만 그 자유는 방향을 잃는다. 우리는 떠오르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이 시대의 인간은 중력이 제거된 세계에서 살아간다. 고통도, 책임도, 정체성도 그저 하나의 선택 가능한 감각으로 분류된다. 도덕은 피드백의 문제로 전환되고, 감정은 좋아요 수로 측정된다. 존재는 더 이상 “있는가”가 아니라 “느껴지는가”로 환원된다.


하지만 실재는 여전히 저 깊은 곳에 남아 있다. 그것은 호출되지 않지만, 사라진 것도 아니다. 실재는 불편하다. 고통스럽고, 망설이게 하며, 때때로 무력감을 동반한다. 그러나 동시에 실재는 관계를 낳고, 윤리를 가능하게 하며, 우리가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남게 만든다. 이 무중력의 시대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시 무게를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새로운 실천이다.


감정을 즉시 표현하는 대신, 잠시 멈추고 감각을 되묻는 일

관계를 즉각 규정하는 대신, 불확실한 거리에서 머무는 일

이미지를 강화하는 대신, 이해받기 힘든 자기로 존재하는 일


이 모든 것은 중력을 다시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실재로 귀환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허상과 감각의 시대를 통과한 이후, 의식된 선택으로서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감각의 해방은 감각의 윤리를 요구하고, 존재의 분산은 새로운 연결의 방식을 요청한다.


우리는 더 이상 실재만을 붙잡고 살 수 없으며, 허상만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남는 것은 이 둘의 긴장 속에서 떠도는 존재의 감각을 윤리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추락하지 않지만, 지면을 그리워하는 존재. 중심은 없지만, 방향을 기억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무중력 시대의 인간이고, 우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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