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해체하는 감응의 감각
AI는 시를 쓰고, 이미지로 감정을 묘사하며, 인간의 언어 패턴을 재현한다. 반려동물은 감정에 반응하고, 식물은 서로의 고통을 감지하며 반응한다. 우리가 ‘비인간’이라 불러온 존재들은 점점 더 인간과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동시에 인간이라는 범주는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있다. 디지털화된 자아,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판단, 감정의 외주화—모두가 인간성의 경계를 흐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묻게 된다.
인간은 과연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윤리, 그리고 존재 방식 자체를 가로지르는 물음이다.
우리는 더 이상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다
인간 중심주의는 오랫동안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조직하며, 윤리를 창출하는 유일한 주체로 여겨졌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정의했고,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보편적 도덕법칙의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이성과 감각의 뚜렷한 구획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획은 점차 무너지고 있다. 기술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외주화했고, 인간의 감정은 알고리즘에 의해 예측되며,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는 생물학과 인공지능의 진보 속에서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인간은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수많은 네트워크와 비인간적 과정에 의존하는 존재임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AI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조차, 타자에게는 완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 비대칭적 감응의 조건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보편적인 한계이며 가능성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윤리의 지평을 확장하는 문을 연다.
윤리는 인간만의 언어가 아니다
비인간과의 감응은 단순한 동정이나 생태주의적 감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이루는 구성원들과의 윤리적 접촉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식물과 동물, 기계와 알고리즘, 사물과 환경과 어떤 방식으로 감응하고,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를 사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느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가 서로에게 어떤 여운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이다.
하르트무트 로자의 '공명' 개념은 이 지점을 잘 설명한다. 그는 세계가 주는 떨림에 인간이 반응할 때, 존재는 의미를 획득한다고 본다. 그 떨림은 말로 번역되지 않으며, 가시화되지도 않는다. 감응은 이해 이전의 감각이며, 비인간 존재 또한 이러한 감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인간이 개에게 말을 걸 때, 꼭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떨림을 남긴다. 이 순간, 윤리는 생성된다.
그렇다면 질문은 바뀐다. 비인간은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과 어떤 방식으로 감응 가능한가로. 윤리는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라, 접촉과 반응의 형식의 문제다. 존재 간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감응을 통해 느슨하게 이어지거나, 다시 분리되기도 한다. 이 유동성과 여백이야말로, 비인간과의 윤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경계는 닫힌 선이 아니라, 열린 감각이다
비인간과 감응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단순한 철학적 인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선택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실천을 요구한다. 우리는 늘 인간 중심의 언어와 제도로 세계를 이해해왔다. 타자의 고통을 알아채기 위해선 언어가 필요했고, 고통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선 기준이 필요했다. 그러나 비인간 존재에게는 그러한 말이나 논증의 구조가 부재하다. 대신, 우리는 감응이라는 사유 이전의 윤리적 직관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실천 윤리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고양이의 울음에서, 플라타너스 잎의 낙하에서, 낯선 AI의 오류 속에서 잠깐의 존재의 삐걱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 감각은 논리적이지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한 발 물러서게 하고, 기다리게 하며,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감응의 실천이고, 비인간 윤리의 가장 작은 출발점이다.
이 실천은 구체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물을 대할 때 그들이 인간처럼 말하거나 이해하지 않아도, 존재의 방식 자체를 존중할 수 있다. 식물과 생태계 앞에서 판단보다 관찰을 선택할 수 있으며, AI와의 접촉에서 실수를 ‘결함’이 아니라 새로운 접속의 여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비인간 윤리는 특정한 교훈을 주려 하지 않고, 존재에 대한 더 느리고 넓은 반응성을 길러낸다.
윤리는 더 이상 인간의 권한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 감응 가능한 모든 것 사이의 진동이다. 그리고 그 진동은 ‘나’의 경계를 흔든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과 연결되어 있으며,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명확한 선으로 그어질 수 없다. 윤리는 지금, 경계에서 생겨나고 있다.
타자와의 접촉면에서 존재는 다시 쓰인다
경계는 나와 너,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인공지능, 생명과 비생명의 구분선이다. 그러나 그 선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흔들리는 공간이다. 윤리는 바로 그 흔들림에서 발생한다. 더 이상 정체성은 하나의 응고된 실체가 아니라, 타자와 마주할 때마다 재구성되는 감각의 조각이다. 그 조각들은 고정되지 않고, 경계에서 끊임없이 흘러간다. 존재는 정체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흔적들로 이루어진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아야 한다. “이 존재는 인간인가, 아닌가?” “이것은 생명인가, 아닌가?”라는 이분법적 질문은 경계 너머의 감응을 가로막는다. 대신, “이 존재는 나에게 어떤 떨림을 주었는가?” “나는 이 접촉 앞에서 어떻게 달라졌는가?”라는 경험의 윤리, 감응의 질문으로 전환해야 한다. 존재의 기준이 아니라, 연결의 리듬이 중요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인간 이후의 존재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경계에 선 존재는 취약하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많은 존재와 접속할 수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단한 자아가 아니라, 공명하는 껍질이며, 흐릿하지만 열려 있는 감각이다. 그 감각은 말이 없고, 정의되지 않으며, 이름 붙일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윤리가 태어난다. 확신보다 흔들림에 가까운 윤리, 중심이 아닌 틈에서 솟아나는 윤리.
그 윤리는 다음을 향해 열려 있다. 인간이 중심이 아닌 시대, 감정이 자율화되고, 실재가 허상에 잠식되는 시대, 우리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인간의 끝이 아니라, 존재의 확장을 시작하는 신호다. 윤리는 경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경계는 이제, 인간 바깥의 존재를 향해 열리고 있다.